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행운은 ‘랜덤’이 아니더라

유행하는 ‘랜덤박스’ 쇼핑몰 이용해보니…

‘듣보잡’ 상품에 가격 대비 만족도 낮고 환불 불가, 불만 글 올릴 수 없는 꼼수 주의
등록 2017-06-02 14:42 수정 2020-05-03 04:28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포털에서 서핑을 했다. 오른쪽 하단 쇼핑 코너의 한 광고가 눈에 들었다. ‘향수 랜덤박스 5000원.’ 아, 이 가격에 향수를 준다는 건가? 설마, 하고 클릭했다. ‘○○마켓’이란 쇼핑몰이었다. 랜덤박스 일반형은 5천원, VIP형은 3만원을 내면 샤넬, 아르마니, 불가리 등 수입 명품 향수를 보내준다고 나와 있었다(택배비 3천원 별도). 단, 제품은 고를 수 없었다. 판매자가 랜덤으로 제품을 담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는 확률형 상품 서비스, 일명 ‘랜덤박스’였다.

사진까지 첨부된 칭찬 일색 후기들

다른 사이트들에 비해 보기 좋은 곳에 노출된 이용 후기들을 읽었다. 친절하게 상품 사진까지 첨부한 후기는 절반도 안 되는 돈으로 명품 향수들을 받아 횡재했다는 내용 일색이었다. 몇몇 후기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판매되는 제품 이미지까지 첨부돼 있었다. 세 번째 페이지를 넘겼을 때 마음에 안 드는 상품을 받았다는 후기가 딱 하나 눈에 띄었다. 지지리 운이 없는 경우가 아니면 진짜 명품 향수를 받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과연 그럴까? 실제 어떤지 궁금했다. 주문하고 기사를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형(5천원)보다 2만5천원이 비싼 VIP로 향수 구매를 결정했다. 싼 게 비지떡일 수도 있거니와 가격이 적당해야 받은 물건의 값어치를 판단하기 좋을 것 같아서였다. 3만원이면 인터넷에서 웬만한 향수를 살 돈이었다. ○○마켓에선 시계도 랜덤박스로 팔고 있었다. 들어가보니 티멕스, 세이코 등 유명 브랜드의 시계 이미지가 게시돼 있었다. 일반형에 해당하는 프리미엄이 3만원, 최고급형이 6만원, VIP형이 9만원이었다. 향수보다 가격이 셌다. 이용 후기는 향수처럼 자기가 받은 시계 사진과 실제 판매가 이미지를 올려놓고 ‘대박’이라며 기뻐하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세이코가 많았고 트리젠코라는 처음 듣는 시계 브랜드도 있었다. 향수와 마찬가지로 부정적 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두 가지 품목은 돼야 ‘행운 랜덤’의 결과로서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최고급형으로 선택한 뒤 결제했다. 택배비 포함 9만3천원이었다.

긍정적인 후기들 때문이었을까. 기사를 쓰기 위해 주문을 하면서도 좋은 제품이 올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일었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선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자명한 진리도 또렷했다. 인터넷 검색도 이런 마음을 더 굳혔다. 한 포털에서 랜덤박스를 검색하면 2만9천 건 넘는 상품이 뜬다. 이문이 많이 남기 때문일까. 애플, 스타벅스 등 해외 기업에서 이벤트성으로 랜덤박스를 국내에 도입한 이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결국 기사를 쓰기 위해선 한 군데에서만 구매할 일이 아닌 듯 싶었다. 한 포털 쇼핑에 입점해 있는 랜덤박스 쇼핑몰에서 남성용 선글라스를 5천원(택배비 2500원 별도)에 팔고 있어 구매했다. 과연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 것인가?

이용 후기 관리자 승인 뒤 게시
인터넷 쇼핑몰 ○○마켓에서 랜덤으로 구입한 6만원짜리 시계와 3만원짜리 향수(오른쪽).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의 제품이 왔다. 횡재는 없었다. 반면 5천원짜리 선글라스는 낮은 가격 때문인지 실망감이 적었다. 류우종 기자

인터넷 쇼핑몰 ○○마켓에서 랜덤으로 구입한 6만원짜리 시계와 3만원짜리 향수(오른쪽).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의 제품이 왔다. 횡재는 없었다. 반면 5천원짜리 선글라스는 낮은 가격 때문인지 실망감이 적었다. 류우종 기자

이튿날, ○○마켓에서 택배가 도착했다. 24시간 만이었다. 두근두근 택배상자를 개봉했다. 안에는 이중 포장으로 향수와 시계라고 적힌 소형 상자가 있었다. 먼저 시계 상자를 열어봤다. 뚜껑에는 타원형 안에 ‘AUDI’라는 로고가 새겨 있었다. 자동차 브랜드 아우디와는 로고가 달랐다. 시계 브랜드는 웬만큼 아는데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였다. 뚜껑을 열어보니 시계판이 블루색인 메탈 소재 시계가 들어 있었다. 디자인은 그럭저럭. 나머지 상자를 뜯어봤다. 충격완충재가 든 포장지 안에는 가죽 파우치 같은 것으로 포장된 향수(100mℓ)가 있었다. 파우치 위에는 ‘크리스아담스 MAN’이라는 상표명이 다소 조잡하게 쓰여 있었다. 이 역시 처음 보는 브랜드였다. 상자 한 면에는 ‘박스 개봉시 교환·환불 불가’라고 쓰여 있었다. 어디까지가 개봉인 건지 알 수 없었다. 확인 뒤 속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상자에 도로 모셔두었다.

브랜드명을 들은 옆자리의 서아무개 기자가 곧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시계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9만원 정도로 판매되고 있었고, 향수는 6만원 정도면 살 수 있었다. 결제 금액으로 보면 분명 싸게 산 것이 맞는데 횡재했다는 기분까진 들지 않았다. 무던한 고객들은 만족할지 몰라도 좀더 유명한 브랜드의 제품을 받아보기 원한 이들에게는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쇼핑몰의 제품 소개를 보면, 본사가 두바이에 있다는 “크리스아담스 향수는 프랑스의 유명한 향 전문가인 크리스아담스가 함께 개발하는 현대적인 감각을 지닌 명가의 향수 전문 그룹”이라는 글이 한 ‘느끼남’의 사진과 함께 떠 있다. 비문이었다. 아우디 시계는 동명의 자동차 회사 브랜드와 무관해 보였다. 인터넷 제품 소개에는 이 시계가 중국산이라고 쓰여 있다.

다시 ○○마켓 누리집에 들어가서 보니 이 브랜드들을 받았다는 후기는 찾기 어려웠다. 후기를 남기기 위해 작성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공지문이 떴다. “이용 후기 작성시 관리자 승인 후 7일 이내에 개시됩니다. 다음에 해당하는 경우 사용자 동의 없이 게시글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명예훼손 게시물 △개인이나 단체에 대해 비방하거나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경우 또는 권리를 침해한 경우 (중략)” 관리자 사전 승인 규정이 있는 게시판은 처음이었다. 어째서 99% 후기가 횡재했다는 내용 일색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구매 고객 모두가 100% 만족하는 건 당초 불가능한 일인데 후기 게시판은 그게 가능한 구조였던 셈이다. 친절하게 사진까지 올린 후기가 진짜 고객들이 작성했는지 의심이 들었다. 행운은 랜덤으로 오지 않았다. 랜덤박스는 ‘꼼수박스’인가.

○○마켓은 “다른 랜덤박스 업체와 달리 고객들이 불만을 제기할 경우 제품의 하지가 없는 한 환불을 해드리고 있다”며 “게시판 후기는 상품을 사지도 않았는데 산 것처럼 허위로 글을 올리는 경우가 많아 부득이 사전 승인제를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표준 약관의 세부 규정 마련 필요

랜덤박스가 유행하면서 소비자의 피해도 속출하고 있다. 한국여성소비자연합은 5월8일 보도자료를 내 랜덤박스 관련 상담 사례 분석 결과, 2017년 1월부터 3월까지 1분기의 상담 건수가 68건으로 전년 38건에 비해 52.7% 증가했다며 소비자의 주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불만 사례 유형별로는 ‘반품 거부’가 53%로 가장 많았고, ‘고객서비스 불만’(33%), ‘품질 불만’(28%) 순으로 나타났다. 반품 거부 53건의 경우 ‘박스 개봉 후 반품 거부’가 94.3%, ‘배송 전 반품 거부’가 5.7%로 택배상자만 개봉했을 뿐 상품 상자에 문제가 없을 때도 반품이 불가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고객서비스 불만은 33건으로 불만 사례 중 두 번째로 높았다. 세부 항목으로 ‘고객센터 이용 불편’이 63.6%, ‘후기 삭제’가 36.4%로 나타났다. 고객센터 이용 불편의 경우 전화 연결의 어려움, 홈페이지 내 주문 취소 버튼 부재, 구매 후기를 남길 때 반드시 비밀번호 기입, 게시판 문의 뒤 응답 지체 등으로 소비자에게 불리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마켓처럼 소비자가 게시판에 불만족스러운 내용의 글을 올릴 때 등록이 되지 않거나 내용이 삭제되는 경험을 한 경우가 고객서비스 불만 내용 중 36.4%나 됐다.

한국여성소비자연합은 “랜덤 상품 서비스의 특성상 상품을 개봉할 경우 상품 가치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비자의 일방적인 취소를 주장하기는 어렵지만, 택배상자만 개봉해도 반품이 불가해 품질이 떨어지는 상품을 받은 소비자는 보호받을 기회조차 상실되고 있다”며 “판매자가 게시판 관리 명목으로 불만족 글을 삭제하거나 게재를 막는 일이 없도록 표준 약관의 세부 규정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이런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5월26일 과 통화에서 “최근 랜덤박스 관련 민원이 많이 들어와 대책을 검토하고 있다”며 “환불 거부나 관리자가 게시판 글을 사전 승인하는 규정 등 소비자 불만 사항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마감 직전, 택배비 포함해 7500원에 구매한 선글라스가 도착했다. 박스를 개봉하니 검은 뿔테에 황금빛 미러 선글라스가 들어 있었다. 5천원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기대심리가 높으면 실망도 적은 것인가. 랜덤박스를 이용한다면 저가를 권하는 이유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