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말 초등학교에선 21세기의 내 모습을 상상해 쓰거나 그려보라는 숙제가 많았다. 장밋빛 전망이 가득하던 시절 상상한 21세기는 대체로 놀라운 테크놀로지의 향연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미래였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자동차, 해저도시와 우주시대가 아이들의 장밋빛 발표를 수놓았다. 화상통신을 하거나 컴퓨터가 모든 일을 대신 해주는 모습도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다. 사이버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 가운데 몇몇은 21세기가 채 되기도 전에 현실에 등장했다. e스포츠도 그중 하나였다.
21세기 상상 중 가장 먼저 현실에 강림한 e스포츠. 사이버공간 속에 펼쳐진 전장에서 전략과 컨트롤로 승부를 겨루는 e스포츠는 동네 오락실의 고수 플레이를 구경하던 ‘보는 게임’을 넘어 하나의 어엿한 스포츠 장르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21세기 정보화 사회에 대한 예언적 전조로서 등장한 e스포츠의 중심에는 이제 ‘아재 게임’으로 불려도 할 말이 없는 고전 게임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이하 )다.
IMF 사태와 PC방 폐인의 등장1998년 한국 사회를 강타한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는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히트한 작품이다. 기존 대전형 게임들의 양자 대결 구도를 넘어 배경 서사부터 게임 구조까지 각기 다르게 설계된 테란·저그·프로토스 세 종족이 이뤄낸 절묘한 게임 균형은 인터넷 멀티플레이라는 새 전장에서 전략의 다양성을 만들며 온라인게임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가 기록한 대흥행은 단지 게임 내적 요소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독자적 문화 현상에 도달한 의 히트를 설명하려면 당시 한국 사회의 극적인 변화와 맞물린 여러 외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의 대성공을 이끈 가장 큰 기술적 배경은 그 무렵 본격적으로 깔리기 시작한 초고속인터넷이다. 198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네트워크 연구 성과에 힘입어 물리적 기반이 되는 기간망 구축은 1990년대 들어 ‘초고속정보통신기반구축 종합추진계획’ 프로젝트를 통해 광케이블을 기반으로 해서 이뤄지기 시작했다.
정보 파이프라인을 도로·전기·가스 같은 수준의 국가 인프라의 일부로 설계했다는 것은 향후 독특한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바로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였다. 국가 부도에 가까운 위기 국면에서 정권을 인수받은 김대중 정부는 경제 진흥을 위한 고부가가치 미래산업으로 정보통신망 기반 정보기술(IT) 산업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마침 세계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준비를 마친 네트워크 인프라에 힘입어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초고속인터넷을 보급한다.
그다음으로 언급해야 할 커다란 변화가 ‘PC방’의 등장이다. IMF 사태로 인한 대규모 감원으로 실직한 이들이 흥행 열풍에 힘입어 PC방을 차렸고, 이후 한국 사회엔 PC방 대흥행 시대가 도래한다. 이전 세대 남성들의 유희 공간이 ‘당구장’이었다면, 1990년대 중·후반 20대를 맞은 X세대의 놀이 공간은 PC방에서 즐기는 ‘ 한 판’이었다.
하는 게임에서 보는 게임으로… e스포츠 탄생는 직접 즐기는 게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는 임요환, 홍진호, 최연성, 이윤열, 강민, 마재윤, 이제동 등 주옥같은 스타를 배출하며 오늘날 우리가 ‘e스포츠’로 부르는 자본주의 대중문화 상품에 가까운 형태로 진화한다.
“하나, 둘, 셋, 임요환 파이팅!”을 외칠 수 있는 팬덤의 등장은 유명 스타 게이머들의 연예인화를 불러왔다. 임요환 같은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1인자, 드라마틱한 경기, ‘2인자’ 홍진호와의 라이벌 구도 정립을 통해(당시 이들의 경기는 임요환의 ‘임’과 홍진호의 ‘진’을 따 임진록이라 불렸다) 직접 게임하지 않는 사람들도 e스포츠가 만들어내는 각본 없는 드라마에 빠질 수 있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홍진호 3연벙 참사’(2014년 11월 대결에서 홍진호가 임요환의 3연속 벙커 옥죄기에 당해 참패했다. 이 사건은 당시 온라인에서 수많은 패러디물을 만들어낸다) 등 여러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며 e스포츠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다. 그러자 유수의 대기업과 트렌디한 기업들이 후원자로 나타났다. SK텔레콤과 KT 같은 이동통신사들은 리그 내에서 자체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이통사 더비’ 같은 이슈를 만들어냈다. 특정 회사가 저작권을 가진 경기가 부산 광안리 백사장에서 10만 명을 모으는 거대한 콘텐츠 산업으로 재탄생하기까지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는 실로 대중문화와 자본이 결합해 만들어낸 새로운 콘텐츠였다.
한국에서 본격 프로스포츠 중계 형태를 갖춘 e스포츠는 세계 전역으로 확장돼갔다. 이 과정에서 한국 프로게이머들과 해외 게이머들의 기량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온라인 세계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에는 ‘게임 괴물’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이 변화들은 의 전성기가 끝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PC방의 대세 게임 는 로부터 사실상 ‘국민 게임’ 왕좌를 물려받았다. e스포츠계에서 이제는 임요환을 넘어서지 않았느냐는 평가를 받는 게이머 역시 한국의 ‘페이커’ 이상혁이다. 종목이 바뀌어도 우세를 유지하는 한국 게이머의 위상을 전세계 게이머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생명 연장의 꿈, 리마스터 버전21세기 초반 한국 디지털 사회의 초석을 다지는 데 일조한 는 이제 생명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제작사 블리자드는 2017년 여름께 의 그래픽과 사용성을 개선한 ‘리마스터 버전’을 신규 출시하고 구버전을 무료로 배포할 것이라고 밝혔다.
리마스터 버전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1998년과 2017년의 게임 판매 방식 차이다. 예전 는 게임이 담긴 CD-ROM과 배틀넷 활성화용 ‘시디키’를 포함한 패키지를 판매했다. 이 게임을 구매하면 싱글플레이는 영원히, 멀티플레이는 서버가 유지되는 한 무한히 플레이하는 권한을 얻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제작사의 수입은 패키지 판매 한 번에 그쳤다.
그러나 2017년 게임의 수익 구조는 과거와 달라졌다. 멀티플레이가 게임의 중심에 들어오면서 게임 제작사의 주 수입원은 프로그램 판매가 아닌 서버 운영을 중심으로 한 유지비용 정액제 형태로 변화했다.
리마스터 버전은 서비스 이용료를 청구하는 형태는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리마스터 버전의 구동은 제작사인 블리자드가 운영하는 ‘블리자드 앱’을 통해야 한다는 점이다. 등 이미 유수의 게임을 서비스하고 있는 ‘블리자드 앱’은 일종의 플랫폼이다. 게이머들을 블리자드 앱이란 플랫폼에 적응시킴으로써 얻는 효과는 리마스터 버전의 판매 수익보다 더욱 큰 경제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리마스터 버전을 플레이하기 위해 유입된 게이머들은 앱 안에서 또 다른 게임으로 진출할 것이다. 이를 통해 게임 제작사가 얻는 수익은 단일 게임의 판매 수익보다 높다.
또 하나의 의미는 바로 e스포츠다. 프로화된 e스포츠의 시발점이 된 것은 였지만, 어느새 의 시대는 저문 지 오래다. 현재 주류 e스포츠는 [DOTA 2] 등 블리자드가 아닌 다른 제작사의 게임 콘텐츠다. 원류가 된 제작사 처지에선 입맛이 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블리자드는 이후 출시한 게임들을 통해 e스포츠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을 회복할 순 없었다. 이 와중에 공식적으로 종료된 는 아마추어리그, 인터넷방송 등을 통해 꾸준한 팬덤의 존재를 증명했다. 한국 내 상황은 더욱 특수해서 아직까지도 PC방 현역 게임 점유율 톱 10에 가 포함돼 있다.
현재의 30~40대가 중심이 되었던 를 게임성을 유지한 채 리마스터해 재출시하면 이 게임은 사실상 전 연령대를 포괄한다. 수익을 노린 정액제나 추가 판매 등을 고려하지 않아도 더 넓은 소비자층을 대상으로 마케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 높지 않은 가격으로 리마스터 버전이 출시된다면, 어떤 의미에선 정말 민속놀이급 게임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이 리마스터의 두 번째 의미다.
우린 아직 를 모른다세기의 도입부를 풍미했고, 새 시대의 전조 구실을 수행한 는 “이제 그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겠다”고 선언했다. 정식 후속작 가 현역임에도 불구하고 전작 리마스터가 이만큼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한편으로 2편의 안타까운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가 이룩한 놀라운 성과가 특정 시대에 얽매일 수준을 넘어섰다는 증거일 수 있다.
리마스터를 발표하는 제작사가 단순히 신규 게임 판매만을 노리는 게 아니듯이, 이를 기다리는 올드팬과 게이머들 또한 고전 명작의 귀환을 마냥 단순하게만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20년 사이 변화한 플랫폼 자본주의의 맥락과 변화된 디지털 공간 내에서 이 게임이 가지는 문화적 맥락 등을 함께 고민하며 되새길 필요가 있다. 는 이미 원작만으로도 디지털 문화사에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게임이 처음 출시되고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라는 게임과 그것이 한국 사회에 끼친 복잡다단한 영향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아직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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