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동네, 이차선 도로를 낀 주택가 상점들. 동네 나이만큼 간판들도 노랗게 바랬다. 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만 나가면 대로변에 번쩍이는 상가가 즐비한 롯데월드타워가 보인다. 크고 반들거리는 동네 옆, 보도블록 귀퉁이가 날긋날긋 닳은 동네에 ‘우리가 몰랐던 미용실’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서울 한복판에 3천원이면 머리를 자르는 미용실이 있다.
커트·파마·염색 등 헤어 시술 저렴하게1월11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 다세대주택, 카센터, 프랜차이즈 치킨집 등이 섞여 늘어선 골목. 그 사이에 ‘드림헤어 미용학원’이 있다. 문 앞 입간판에 커트 3천원 등의 문구가 쓰여 있지만 주변이 어수선해 그다지 눈에 띄진 않는다. 그래도 알음알음 사람들이 찾아온다. 요즘은 새해를 맞아 머리하러 오는 손님들로 평소보다 더 북적인다.
통유리창 뒤로 여느 미용실처럼 손님들이 앉아 헤어 시술을 받고 있다. 문을 밀고 들어서니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주황, 빨강, 초록… 알록달록 물들인 것부터 길고 짧은 가발이 즐비하다. 오랜 세월 사람 손을 탄 듯한 가발과 마네킹들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어쩐지 비범한 주인공이 나타날 것 같은 1990년대 할리우드 영화 속 배경 같기도 하다. 영화 속 주인공 대신 안소은 드림헤어 원장과 연습생들이 우리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뭐 하실 거예요?” 보통 미용실과 다름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미용학원 연수생들이 실습 차원에서 손님 머리를 잘라준다. 아직 손이 가위에 익숙지 않고, 미흡할 경우 마무리는 원장 손을 거치기도 해 제값을 다 받진 못한다. 커트는 3천원이고 파마와 염색, 트리트먼트, 각종 최신 헤어 시술도 1만원에 가능하다. 한때 유행하던 남성 헤어 전문점 커트 가격이 7천원이니 가격 경쟁력은 절대 우위다.
연수생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헤어 시술을 해주는 미용학원은 전국에 여러 곳 있지만, 이곳에서는 특히 65살 이상 노인과 장애인에겐 커트비를 안 받는다. 파마와 염색을 할 때 약값 1만원만 받는다. 1년 전에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동네 주민들이 찾아오면 커트비를 받지 않았지만, 주변 상가의 눈치가 보여 돈을 받는 것으로 전환했다.
“추운데, 커피 한잔 드릴까요?” 커트비 3천원만 받아도 차 한잔 대접할 여유는 있다. 그러다보니 손님들은 고맙다며 간식이나 음료수를 연수생들 품에 그득 안겨놓고 떠나곤 한다. 동네 사랑방이나 다름없다. 이날도 손님이 사온 귤 한 아름을 연수생과 손님들이 나눠 먹었다.
맨 끝자리에 조는 듯 앉아 헤어 시술을 받던 할머니가 함박웃음을 띤다. 짧은 머리를 연신 뒤로 쓸어본다. 동네 주민이라는 오양선(96) 할머니. 일평생 수없이 파마를 해왔지만 또 이렇게 감동한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파마하려고 동네를 돌아다녔는데 4만원 달라고 해서 놀라 뛰어나왔어요. 그런데, 고맙게도 이렇게 예쁘게 잘해주네.”
손이 덜덜 떨리던 첫 가위질할머니 손님이 가장 많으냐는 질문에 “의외로 다양한 연령층이 찾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남녀노소 비율을 따지면 할머니 30%, 할아버지 20%, 10~20대 20%, 30~40대가 30%라고 한다. 학생, 상인, 시의원 등 미용실을 찾는 계층도 다양하다.
손님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군인일 테다. 연수생들은 일주일에 한 번 군부대를 방문한다. 학생 10~15명과 강사들이 적게는 200명, 많게는 300~400명의 머리를 깎고 돌아온다. 군인들 머리 깎는 게 최신 헤어 기술 익히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연수생들이 말했다. 제각기 다른 두상에 맞춰 머리를 잘라야 하고, 조금만 실수해도 ‘땜빵’이 생겨 순발력과 정교함이 필요하다.
연수생 김나현(49)씨는 처음 머리를 깎아준 군인을 기억한다. “군대에 처음 실습 나가서, 바리캉을 들고 머리를 깎으려는데 손이 벌벌 떨리는 거예요. 그 군인이 일병이었는데 하필 이발병이래요. 그러니 더 떨리죠. 어떻게 깎았는지 모르고 시간이 지나갔어요. 덜덜 떠는 게 보였을 텐데 아무 말 안 하더라고요. 한참 지나 그 군인을 다시 만났어요. 제대한다고, 고맙다고 했어요.”
연수생들에게 기자의 머리도 맡겼다. 안소은 원장이 머리를 살짝 다듬고 드라이를 해보라고 권했다. 실습장에서 가장 베테랑인 김나현씨가 가위를 잡았다. 다듬은 지 오래되어 삐죽삐죽한 머리끝을 가지런히 정돈했다. 수다스럽진 않지만, 저음으로 차분하게 말을 거는 김씨는 가위질도 말하는 태도와 비슷했다. 찬찬한 가위질에 신뢰감이 들었다.
김나현씨는 결혼 전 직장 생활을 했다. 20대 때 동사무소(주민센터) 공무원으로 일하다 신라호텔 고객관리부로 자리를 옮겼다.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키우다 “놀면 뭐하나, 기술이나 배워두자” 싶어서 미용학원에 발을 들였다가 홀랑 빠져들었다. 손이 야무지고 성실한 김씨에게 안소은 원장은 기능장까지 따서 강사로 일하라고 권할 정도다. 사람들 만나 이야기 나누고,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 재밌다. 무엇보다 그가 미용을 시작하니 중학생 딸이 가장 즐거워한다. “방학마다 머리 모양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 이 색깔 했다 저 색깔 했다가….”
학원에는 손님만큼 연수생의 연령층도 다양했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낮 수업을 하다보니 자격증을 따려는 고등학생보다 재취업 준비생이 대부분이다. 자격증 수업 교실에는 30대 남성과 60대 여성이 수업을 듣고 있었다. 이 취재한 날, 실습장에 있는 수강생 4명 가운데 막내 유지혜(25)씨 빼고 세 사람은 40대 중·후반이다.
힘껏 당기는 머리, 젖혀지는 고개다음으로 박정금(47), 이은희(47)씨가 머리를 반듯하게 펴는 매직기로 모양을 다듬기로 했다. 박정금씨는 45살까지 일반 사무직으로 일하다 유리천장에 부딪혀 직장을 그만뒀다. “밖에서 얘기하듯이 딱 45살이 되니까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미용 기술을 배웠으니까 체력만 받쳐주면 앞으로 20년은 더 일해야죠.”
이은희씨는 결혼 직후 미용 자격증을 따고 오랫동안 전업주부로 지내다 현장에 나왔다. “너무 재밌어요. 사람들이랑 얘기도 많이 하고. 요즘은 미용실이 다 프랜차이즈가 돼서 너무 크고 화려한데, 이런 동네 미용실은 왜 사랑방이라고 하는지 알겠어요. 온갖 이야기가 쏟아져나와요.” 두 사람은 각각 취업과 창업을 꿈꾼다.
두 연수생에게 어떤 분야를 가장 좋아하냐고 물으니 “커트가 제일 재미있다”고 했다. 이은희씨는 “삭삭, 소리 내며 머리가 정돈될 때 기분이 좋다”고 했다. 박정금씨는 “같은 커트라도 사람마다 같을 수 없는 점”이 흥미롭다고 했다.
하지만 이날 미션은 두 연수생을 곤란하게 했다. 안소은 원장이 “머리 길이나 얼굴형이 머리를 살짝 밖으로 말면 어울릴 것 같아. 한번 해봐요”라고 권유하니 박정금씨가 작은 소리로 “아웃컬 잘 못하는데…”라고 말한다. 자신 없는 걸 해달라는 손님이 오면 어떡하냐고 질문하니 “조금 두렵고 부담스럽긴 한데, 손님이 원하니까 배우면서 해드려야죠”라고 말한다. 박정금씨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섬세하게 머리카락을 잡았다.
하지만 자주 들어오는 주문이 아니어서 그런지 의욕 충만한 두 연수생의 양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편안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지만, 양쪽에서 번갈아가며 힘주어 머리를 당기는 바람에 자꾸만 몸이 따라가고 고개가 젖혀졌다.
두 연수생이 정성껏 말아준 머리가 완성됐다. 파마와 염색으로 손상이 심했던 머리에 탱글탱글 탄력이 살아났다. 하지만 수수한 얼굴에 비해 머리가 다소 화려해보였다. 평소 같으면 머리 모양이 생각한 것과 조금만 다르게 나와도 속상했을 텐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원장님이 다가와 스프링처럼 통통 튀어오른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가만히 누르면서 연수생들에게 말했다. “요즘은 이렇게 세게 말면 안 돼요, 자연스럽게.” 실습 대상이 돼 행여 머리 모양이 잘못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20년 이상 경력의 기능장 기술을 가진 안소은 원장의 손길로 누그러든다. 연수생들이 뒤에서 지켜보는 동안 원장님이 매직기로 머리를 자연스럽게 정돈했다. 순식간에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실수를 인정하며 위로를 얻는 공간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이곳은 더없이 즐거운 미용실이다. 다소 미숙하고 손놀림이 재빠르지 않아도, 3천원이라는 가격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마음이 든다. 오차 없는 전문성과 값비싼 대가만 요구하는 세상에서, 어른들이 모여 서로의 실수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공간은 흔치 않다. 우리는 누구나 처음부터 능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체로 잊고 산다. 여기서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는 것을, 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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