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고3이던 나는 혼자 영화를 보러 가곤 했다. 요즘에야 혼밥·혼술·혼영이 흔한 일이 됐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서간(?!) 혼영은 고3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나만의 소박한 일탈이었다.
그때 나는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만 네 차례 보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케빈 코스트너가 감독과 주연을 겸한 이었다. 미국 남북전쟁 시절 인디언 부족에 동화된 백인 군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였는데, 인디언을 약탈자 정도로만 그려온 기존 서부극과 달리 인디언 사회를 이해하려 하고 그들을 침략하는 백인들의 해악을 정면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머릿속에 영화관이 하나 들어선 느낌영화를 처음 보고 극장을 나온 나는 음반가게로 향했다. 영화 속 선율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카세트테이프도 CD도 아닌 LP를 호기롭게 사서 거실에 있는 턴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때론 서정적이고 때론 웅장한 오케스트라 선율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당시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음악의 거장인 작곡가 존 배리의 솜씨였다. 존 배리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다. 노랫말 하나 없이 100% 연주곡으로만 이뤄진 OST를 계속 듣고 있으니 영화 속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영화를 또 보고 싶어졌다.
극장에서 두 번째로 을 볼 때는 또 다른 감흥과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수없이 반복해서 들어 외우다시피 한 영화음악이 영상과 착착 달라붙는 순간의 쾌감은 더없이 짜릿했다. 영화를 두 번 보고 나니 영화음악만 들어도 해당 장면의 필름이 스르륵 돌아갔다. 마치 머릿속에 영화관이 하나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러다보니 또 극장에 가고 싶어졌다. 이 내려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기로 했다. 지금은 사라진, 서울 을지로의 국도극장에 갔다. 영화를 한 번 봤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러고는 다음 상영회차가 시작할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극장에 관객이 별로 없어선지 나가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네 번째 을 봤다. 하루 두 번은 무리였는지 막판에 살짝 졸기도 했지만, 결정적 장면의 감흥은 결코 반감되는 법이 없었다.
그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두 번 본 적은 몇 차례 있지만, 세 번 본 적은 없었다. 얼마 전 를 만나기 전까지는.
는 소문대로 엄청난 영화였다. 재즈 드러머 이야기를 다룬 전작 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화제작으로, 개봉 전부터 전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국내에선 2016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였는데, 표를 못 구해서 다들 난리였다. 11월 언론시사회에서 드디어 만난 는 나를 단숨에 사로잡고 말았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고속도로에서 촬영한 오프닝 장면부터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긴 나는 마지막 엔딩 장면의 두 남녀 주인공 눈빛에 다리가 풀려 일어날 힘도 없었다.
음악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지만, 음반가게에 가진 않았다. 아직 OST가 출시되기 전이었다. 영화가 개봉하고, OST도 출시됐다. 차에서는 CD로, 길을 걸을 때는 스마트폰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또 극장으로 향했다. 많이 들어서 익숙해진 음악과 영상이 착착 달라붙는 순간, 꼭 25년 전 그때의 쾌감이 다시금 밀려왔다. 맞아, 이거였어!
퍼즐 조각처럼 하나하나 끼워 맞추며는 뮤지컬영화다. 오프닝부터 대규모 군중이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서 춤추며 노래한다. 배우 지망생 미아(엠마 스톤)는 룸메이트들과 춤추고 노래하며 파티를 즐기고,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천(라이언 고슬링)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직접 노래도 한다.
저녁놀 어스름한 언덕에서 미아와 세바스천이 밀당을 하며 탭댄스를 추는 순간 흐르는 음악에 어찌나 설레던지.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로 부웅 떠올라 데이트를 하는 순간 흐르는 음악은 얼마나 달콤하던지. 그리고 막판 10분간 영화 안의 작은 영화를 보는 듯한 회상(상상) 장면에서 흐르던 음악은 차라리 한 편의 대서사시였다. 음악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할 뿐 아니라 음악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영화 . 결국 또 극장에 가서 세 번째 관람을 하고야 말았다. 음악과 장면을 퍼즐 조각처럼 하나하나 완벽히 끼워 맞추면서 말이다.
영화를 세 번째 보니 이전에는 안 보였던 장면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미아와 세바스천이 리알토 극장에서 고전영화 을 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스크린에서 제임스 딘이 오픈카를 몰고 그리피스 천문대로 가는 장면 구도가 얼마 뒤 세바스천과 미아가 실제 오픈카를 몰고 그리피스 천문대로 가는 장면 구도와 거의 똑같다. 세바스천의 차를 왜 클래식 오픈카로 설정했는지 감독의 세심한 의도까지 엿볼 수 있었다.
관객은 2016년 12월28일 기준으로 210만 명을 넘어섰다. 2014년 크게 히트한 음악영화 보다 빠른 속도다. 나처럼 반복 관람하는 관객 비율이 얼마나 될까. 난 을 두 번 보진 않았다. OST는 발매 20일 만에 1만5천 장가량 판매됐다. 보통 영화 OST 판매량이 5천 장 정도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치다. 사람들이 영화에, 그리고 음악에 뜨겁게 반응하고 있다.
그때 그 열정 되살려준난 요즘도 OST를 1번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순서대로 들으며 머릿속 영사기를 돌리고 또 돌린다. 이러다가 극장으로 또 가서 네 번째 관람을 하게 될 거라 확신한다. 나에게 25년 전 그 기억, 그 감흥, 그 열정을 되살려준 의 데이미언 셔젤 감독, 그리고 그의 대학 동창이자 친구인 음악감독 저스틴 허위츠에게 감사한다. 곧 있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다른 상도 상이지만 음악상을 꼭 받길 기원하며 음악 재생 버튼을 또 누른다.
서정민 씨네플레이 대표·전 대중음악 담당 기자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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