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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연일체

등록 2016-11-02 22:53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10년 전 독일의 기억이 떠오른다. 박근혜 대통령 뒤에서 국정을 농단해온 최순실이 딸과 도피해 있는 그곳.

2006년 9월, 대선 출마를 준비하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했다. 한복을 차려입고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난 그는 감회에 젖었다.

감회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어진 저녁 기자간담회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당시 동행했던 기자는 ‘과거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을 국민 앞에 공식 사과할 생각이 없느냐’란 질문을 던졌고, 순간 간담회장은 싸늘한 얼음장으로 변했다. 박 전 대표는 심한 모욕을 당한 듯했다. 분을 억누르느라 입을 앙다물었다. 무거운 침묵 뒤 “이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 사과를 했지 않느냐”고 쏴붙였다. 다시는 입에 올리기도 싫다는 노여움이 선명했다. 이젠 정권의 핵심이 된 수행 측근들(김기춘 전 비서실장, 최경환 의원,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 정호성 청와대 제1부속비서관)은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역린의 존재와 두려움에 휩싸인 무력한 참모들의 실체를 목격한 순간이었다.

역린, 박정희와 최순실

10년 뒤, 살아 있는 역린이 실체를 드러냈다. 최순실. 국정을 거의 결재 맡기다시피 한 박 대통령에게 그는 결코 드러나선 안 되는 존재였다. 그의 실체는 용케 가려져왔다. 때론 전남편 정윤회에게, 때론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에게 가렸다. 대통령은 그의 존재를 꼭꼭 숨겼고, 청와대 참모들은 누구도 감히 실체를 알려 하지 않았다. 역린은 자라나 대통령을 뒤덮고 스스로 대통령이 돼버렸다. 딸의 승마 국가대표 선발과 이화여대 입학 과정에서의 특혜, 온갖 겁박과 무리수로 얼룩진 미르재단·K스포츠재단 설립 과정에서 ‘또 한 명의 대통령’인 그의 존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박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뒤 1998년 대구 달성 재·보궐 선거에 당선될 때까지 18년의 유폐 생활 동안 최씨에게 기댔다. 박정희 정권 시절 깍듯했던 장관이 자신의 인사를 외면하자 일기에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사다”(박 대통령 에세이집 )라고 적을 만큼 박 대통령이 배신에 치를 떨던 시절 최씨는 그의 영혼을 잠식했다. 그것이 최씨의 아버지 최태민 때부터 내려온 인간적 정 때문인지, 아니면 정체불명의 종교적·영적 교감 탓인지는 아직 알 길이 없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과거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에서 멈추지 못했다. 급기야 국가원수의 직무마저 넘겨버렸다. 연설문은 물론 북한과의 접촉 사실이 담긴 안보 기밀까지 미리 최순실에게 건넸다. 최씨는 청와대에서 매일 두툼한 대통령 보고자료를 받아보고 측근들과 국정이나 청와대 주요 인사 문제를 논의했다. 최씨의 서울 강남 사무실은 또 하나의 청와대였다. 선출된 권력도 아닌, 전혀 전문성이라고는 없는 그가 나라를 무면허로 운전해온 것이다. 어마어마한 존재감에 견주면 비선 실세라는 말도 무척이나 가볍다.

국민을 모욕한 대통령

박 대통령과 최씨가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혼연일체가 되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도 봉건시대 혹은 그 이전 시대와 구분할 수 없게 돼버렸다. 대통령은 1분40여 초짜리 녹화 사과에서 “좀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최씨에게 의견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순수한 마음’을 납득하지 못한다. 아무도 최씨가 무슨 자격으로 국정에 관여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세월호 참사 때 이미 ‘국가 붕괴’를 경험한 시민들은 이젠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한다. 각계에서 시국선언이 분출한다. 권력을 무자격자와 함부로 공유한 대통령, 그래서 국가성을 형해화한 대통령을 향해 시민들은 거리로 나선다. 세상 어떤 대통령도 이렇게 국민을 모욕할 수는 없다. 시민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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