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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말’을 고르고 있을 대통령에게

등록 2016-10-25 23:02 수정 2020-05-03 04:28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의 특혜 의혹과 관련해 ‘어디에선가 말을 타고 있을 너에게’라는 제목으로 이화여대 학생이 쓴 대자보를 패러디한 글입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어디선가 ‘말’을 고르고 있을 대통령에게

저, 올 초에도 밤을 새웠습니다. 대통령이 쓰신(직접 쓰셨는지 확실치 않지만) 179건의 연설문을 포함해 역대 대통령 연설문 2597건과 각종 논문을 뒤적이고 노트북으로 데이터 분석 프로그램을 돌리면서, 밤을 꼬박 새우며 ‘대통령의 말’을 분석하는 기획기사를 썼어요. 당신이 역대 대통령보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홀대하고 ‘애국심’ ‘적폐’ 같은 단어를 불뚝 쓴다는 게 숫자로 확인됐지요. 당신은 연설문에서 북한을 향해 ‘퍼주기’라는 말을 처음 쓴 대통령이기도 했어요. 공식 회의에서 ‘혼이 비정상’ ‘암덩어리’ 같은 말을 하던 당신이 올해부터 연설문에서도 격한 감정을 드러낸다는 점도 기사에서 지적했죠.

대통령의 말은 역사

당신이 특별히 미워서가 아니에요. 궁금했거든요. 대통령 연설문은 역사이고, 대통령은 말로 국정을 운영하거든요.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빨간펜’ 선생님처럼 연설비서관이 쓴 연설문 초안을 꼼꼼히 고쳐 돌려보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일찌감치 연초부터 1년 연설을 구상했다고 하더라고요. 당신이 어떻게 말을 고르고 벼르는지 궁금해서 취재했지만, 이상하게 연설문 작성 과정은 별로 알려진 게 없었어요.

당신은 어젯밤 어디서 말을 골랐을까요? 10월2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꺼낸 말은 설마 직접 쓰셨겠지요? 아마 “큰 대통령 관저에서 스탠드 전등 하나만 켜놓고” 쓰셨겠죠. 대통령이 최순실씨의 미르·K스포츠재단 ‘사유화’ 의혹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우리가 궁금한 걸 당신은 모르셨을까요? 고작 “만약 어느 누구라도 재단과 관련해서 자금 유용 등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는 말이 전부더군요. 최순실씨 ‘최’자도 언급하지 않은 채요. “지나친 인신공격성 논란이 계속 이어진다면 기업들의 순수한 참여 의지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변명으로 가득 찬 말이 대부분이었어요. 평소 유체이탈 화법 그대로,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요.

아참, 말이 나온 김에 말인데요. 최순실씨가 승마선수인 딸이 탈 ‘말’을 사고 선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기업을 동원했다는 의혹도 있더라고요. 부모가 “능력 있으면” 탈 수 있는 말의 가격과 급이 달라진다나요. 국제승마연맹 누리집에 있는 정유라 선수 프로필에는 “아버지가 한국 박근혜 대통령을 보좌했다”고 자랑해놓았더군요.

누군가는 당신이랑 정유라씨가 부모를 잘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공주님’이라 불리는 것도 비슷하다나요. 어린 나이에 부모 잃고 친동생들도 멀리할 정도로 ‘나라’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전폭 지지를 보내는 이가 많았어요(최근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처음으로 20%대로 하락하긴 했지만). 그런데 어쩌다 당신의 가족도 아닌 최순실씨 가족이 ‘신성 가족’이 된 걸까요.

간절히 원하면 ‘그’가 나서서 도왔을까

이젠 오히려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그동안 다른 대통령의 말이 얼마나 빛나는 것인지, 비문 없는 연설문이 얼마나 괜찮은 것인지 알았으니까요. 아마 앞으로도 안중근 의사 순국 장소를 뤼순이 아닌 하얼빈이라고 대통령 연설에서 잘못 말하는 따위의, 경험은 할 수 없겠지요.

아참, 연설문을 최순실씨가 고쳐줬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오더군요.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말은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이었나요. 청와대가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답한 것처럼, 아니었으면 합니다. 대통령 연설문을 그분이 진짜 고쳤다면 대한민국 국민인 게 부끄러울 것 같아요. 이런 말 자체가 나오는 게 안타깝네요. 마음속에 메트로놈 하나 놓고 달그닥, 훅 하고 싶은 밤입니다.

2016년 10월24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나올 ‘말’을 기대하며, 한 언론사의 기자 드림.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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