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1929년 12월9일~2011년 9월3일)이 떠난 지 5년. 그의 삶을 담은 평전의 ‘개정 증보판’이 나왔다. 1990년 그의 회갑을 기념해 펴낸 구술 회상록 이 저본이다. 당시 이소선의 말을 글로 담아냈던 민종덕(63) 전 청계피복노조 위원장이 이번에도 어려운 작업을 맡았다. (돌베개 펴냄)에는 1990년 이후 이소선의 삶은 물론 기존 내용도 크게 보완해 실렸다. 이야기 형식이어서 읽기에도 수월하다.
이소선의 삶은 정확히 둘로 나뉜다. 여든두 해 그의 생애를 가르는 분기점은 1970년 11월이다. 그의 맏아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제 몸을 불태워 숨졌다. 전태일은 숨지기 전 이소선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담대해지세요.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전태일의 어머니’였던 41살의 이소선은 이후 ‘노동자의 어머니’로 41년을 살아간다. 책의 첫머리가 전태일 분신 사건에서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후 이소선은 전태일과 뜻을 함께했던 친구들은 물론 청계천 노동자들과 함께 청계피복노조를 만들었다. 유신독재 아래서 그는 여간첩으로 내몰리고, 경찰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세 번이나 교도소에 갇히기도 했다. 아파트 한 채를 주겠다는 정권의 회유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이소선은 인내하고 물리쳤다.
지은이 민종덕은 이소선이 동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전한 가르침을 몇 가지로 추렸다. 사사로운 이익이나 감정에 굴복하지 않고 대의에 충실했다. 노동자를 사랑하는 실천에 그 어떤 편견이나 편가름이 없는 분이었다. 1970~80년대 척박한 노동 현장에서 탁월한 예지와 승리를 향한 낙관으로 용감하게 투쟁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선도했다. 한번 약속한 것을 끝까지 지키고 실천한 의리의 여장부였다.
이소선의 강단은 어린 시절부터 짐작할 수 있는 품성이다. 일제강점기 경북 달성군(지금의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농촌의 굶주린 딸이었다. 아버지가 숨진 뒤 새로 결혼한 어머니를 따라간 정씨 집안 마을에서 그는 ‘데려온 자식’이라는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그때 그는 문중 어른에게 사람 차별을 말라고 따져 묻기도 했다. 책에는 부당함을 참지 못하고 당당하게 대항하는 그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이소선은 “인간 차별이라면 지긋지긋하다”며 평생을 불평등과 차별에 맞섰다.
시인 고은은 2011년 9월7일 이소선의 영결식에 맞춰 추모시를 지었다.
“저 먹통 같은 시대 또는 개 같은 시대에/ 생짜로 아들을 묻은 어머니로부터/ 그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내내/ 바람 쳐 대는 땅 위의 어머니였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한 아들의 어머니이자/ 한 아들의 무덤인 어머니이자/ 세상의 뭇 아들의 뭇 어머니로/ 뼈 앓으며 살 쓰라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에게는 혈육이었고/ 누구에게는 동지이고/ 누구에게는 호박넝쿨 울타리이고/ 누구에게는 심연이었습니다”(고은 시 ‘당신의 죽음을 울지 않습니다-이소선씨 별세에 부쳐’ 부분)
이소선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 전태일의 묘 뒤편에 있다. 이소선은 전태일을 바라본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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