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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었으면 좋겠다

금기시된 사랑 다룬 <사돈의 팔촌> 마술 같은 장면… 소년의 꿈일까
등록 2016-05-29 08:47 수정 2020-05-03 04:28
서울독립영화제 제공

서울독립영화제 제공

“사촌이긴 한데, 사돈의 팔촌이었으면 좋겠다.” 영화 첫 장면에서 우리가 듣는 문장은 이러하다. 남자와 여자는 아마도 사촌지간일 것이다. 그런데 왜 난데없이 ‘사돈의 팔촌’이 되고 싶은 걸까.

그렇게 시작한 영화는 1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온 가족이 한집에 모인 날이다. 어른들은 뭔가 진지하게 회의 중이고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놀고 있다. 유독 두 아이가 눈에 띈다. “돼지 오빠”라고 놀림을 받는 소년과 그를 오빠라고 부르지만 그보다 키가 크고 성숙해 보이는 소녀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소녀는 오빠에게 짓궂은 장난을 걸고 소년은 소녀의 장난이 그리 싫지 않은 눈치다. 둘은 주로 과격한 몸싸움을 하며 노는데, 소녀가 시종일관 소년을 제압하고 있어서 소년은 어쩐지 억울한 위치에 있는 것 같지만, 그런 상황을 살짝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별일 없이, 여느 가족모임이 그렇듯, 어른들 사이에서 약간의 언쟁이 벌어지고 과한 장난 때문에 소년과 소녀는 화장실에서 벌을 서고 있다. 이 자잘하고 평범한 일들로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의문이 들 때쯤 마술 같은 한 장면이 펼쳐진다.

벌을 서던 소년과 소녀는 천장에서 이상한 물소리를 듣는다. 이전 장면에서 옥상에 올라갔던 소녀는 여기에 물을 채워서 수영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둘이 옥상으로 다시 올라가 문을 열자 놀랍게도 옥상 바닥은 찰랑거리는 물로 가득하다. 소녀가 그 물에 발을 담그고 즐거워하며 난간 쪽으로 걸어가자,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소년도 뒤를 따른다. 그리고 느닷없이 뒤에서 소녀를 와락 끌어안는다.

옥상 위에서 반짝이는 물, 소녀의 맑은 미소, 소년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어우러진 이 장면의 섬세하면서도 용감한 호흡은 보는 이에게 이상한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집 안에서 우리가 느꼈던 둘 사이의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한 긴장감이 이 순간 아름답게 해방되는 것만 같다. 이것은 혹시 소년의 꿈일까? 꿈이 아니라면 저 장면에 스민 애틋한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

꿈이 아니었다. 그날 헤어진 소년과 소녀는 10여 년 만에 그때 그 집에서 다시 이루어진 가족모임에서, 어른이 된 모습으로 재회한다. 여자는 유학을 준비 중이고, 말년 휴가를 나온 남자는 여자가 한국을 떠나는 날 군대에 복귀해야 한다. 남자 손에는 얼마 전 여자에게서 온 긴 편지가 들려 있는데, 편지의 자세한 내용을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어색한 만남, 그러나 이내 다시 시작되는 격한 몸싸움. 이제 그 몸싸움에는 예전과 달리 성적인 위태로움과 호기심이 배어 있다. 오래전 옥상에서의 그 장면이 다시 열릴 듯 말 듯 내내 그 집을 맴돌며 둘 사이의 공기를 점점 더 팽팽하게 만든다. 하지만 팽창된 공기는 비극으로 폭발하지 않는다. 단 한 장면, 그러니까 어린 날의 옥상 장면을 움직이던 활기가 영화 전체에 일으킨 잔잔하고 아름다운 파동 덕분에 금기시된 사랑 이야기는 슬픔과 절망에 빠지는 대신, 명랑한 리듬을 잃지 않는다. 어떤 결말이 다가오든, 그 명랑함을 끌어안아주고 싶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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