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놀랄 만큼 단순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영화의 독창성이란 “단순함이 갑작스레 내비치는 뜻밖의 표정”에서 비롯된다. 화려한 볼거리와 복잡하게 위장된 서사, 수백억원의 자본으로 무장한 영화들에 익숙한 오늘날의 관객에게 그의 말은 선뜻 이해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 이들을 위해, 여기 영화적 단순함이야말로 영화적 풍요로움에 다름 아님을 또렷이 증명하는 한 편의 영화가 도착했다. 필리프 가렐의 은 여자와 남자와 낡고 작은 방 한 칸, 그리고 걸음걸이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그 세계는 요란한 영화적 장치, 젠체하는 장광설 없이 오직 이 네 개의 단순한 요소들의 활동만으로 진귀하게 아름답다.
마농과 피에르는 권태롭지만 서로에게 의지하며 부부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상대를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남편과 아내가 아닌 다른 남자,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지속한다. 이것이 이 영화를 지탱하는 이야기의 전부다. 원망과 애증, 질투와 후회, 그러니까 진부한 이야기에서 예상 가능한 감정이 인물들 사이를 오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동안 이 부부를 감싸는 소우주가 우리의 마음을 두드린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로 하여금 그 소우주를 한껏 긍정하게 만든다면 어째서일까.
부부가 살고 있는 집, 혹은 다른 상대와 밀회를 즐기는 집, 아니, 방 한 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공간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집주인이 예고 없이 들이닥치고,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때문에 신발도 벗어야 하며, 바깥의 소음은 여과되지 않는다. 사적 안정이 지켜지지 않는 공간에서 부부가 일상을 영위하고 연인들이 사랑을 나눈다. 그 좁은 공간에서 그들은 서로의 변심을 알아채고 눈치를 살피며 서로를 속이고 충돌한다. 영화적 공기는 불안하고 위태로우며 어딘지 긴장되어 있거나 주눅 들어 있다. 그런데 그 숨 막히는 공기가 영화적으로 해소되고 활력을 얻는 순간은 인물들이 거리로 나올 때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물들의 걸음에 카메라가 동행할 때다.
그들은 걸으면서 싸우거나 화해하고 걸으면서 서로에게 설레고 걸으면서 후회하고 다짐한다. 그들은 상대의 발걸음의 리듬을 예민하게 감지하거나, 상대의 속도와 부딪치며 혼자만의 걸음을 걸으려고 한다. 방금 전까지 작은 방에서의 어긋남 때문에 수축됐던 마농과 피에르의 관계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한곳을 나란히 바라보며 씩씩하게 걷는 둘의 모습으로 활기를 회복한다. 혹은 피에르와 낯선 여인의 호기심 어린 대면은 상대의 걸음 속도를 탐색하며 허둥지둥 천진난만하게 발을 맞추는 둘의 모습으로 전달된다. 걸음의 최종 목적지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행위의 순간이 전파하는 조심스럽거나 경쾌하고 모호하거나 투명한 기운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 인물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대사나 표정이나 행동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걸음걸이의 감정이 이 영화의 간절한 영화적 활동이자 마법인 것 같다.
은 인물들의 걸음을 멀리서 찍거나 한자리에서 관찰하며 그들이 화면 밖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마치 사랑하는 상대의 걸음걸이에 온몸의 촉수를 세우고 집중해서 최대한 같은 호흡으로 따라가려고 애쓰는 연인처럼 인물들의 걸음에 공명하며 그렇게 찍었다. 인물들의 슬픔과 고통과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깊게 밴 따스함은 바로 이 영화가 인물들의 움직임과 함께 이뤄내는 아름다운 리듬에 기인한다. 이제 일흔 살에 가까워진 노감독이 여자와 남자와 작은 방과 걸음걸이만으로 창조해낸 소우주를 경험하는 동안,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가장 단순한 것에 가장 맑은 영화적 진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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