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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인, 바람이 분다

아름답고 사무친 새로운 무협… 허우샤오셴 감독의 신작 <자객 섭은낭>
등록 2016-03-02 16:56 수정 2020-05-03 04:28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사 진진 제공

이야기나 사건, 캐릭터나 장면이 아니라, 특정한 영화적 요소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허우샤오셴 감독의 을 보며 그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단 하나의 영화적 요소를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바람이다.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 바람이 등장하거나 깃들어 있다. 마치 바람의 흐름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무협의 세계. 그 세계는 어떤 곳일까.

을 줄거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캐릭터로 해석해보려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면, 이 영화에는 이야기가 없다. 영화가 기반으로 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고 해도, 1인2역으로 등장하는 인물들 각각을 분별할 수 있다고 해도(친절하게도 인물 정보가 한국어 자막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그 정보들이 영화를 감상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영화를 더 잘 알게 된다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무협영화에서 예상하는 갈등 구도는 흐릿하고 충돌의 사건은 최소화되었으며 인물들의 행동을 추동하는 내면은 모호하게 처리되었다. 이 영화와 만나는 유일한 길은 이해가 아니라 경험이다. 세계를 이루는 영화적 요소가 어떻게 살아나는지, 혹은 어떻게 소멸되는지, 그 결들을 예민하게 감각할 때만 우리는 에 조금이라도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요소 중 바람은 이 정적인 무협영화에서 칼부림보다 더 집요하고 지속적인 운동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거대한 자연이 단순히 대상화된 풍경이나 미학적 허세로 보이지 않는 건 풍경을 이루는 자연의 요소들이 충실한 리듬으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그 리듬을 가능하게 한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들판이 일렁이며, 강물이 흐를 때, 신비롭게도 영화 표면의 이 생기로운 활동은 한 편의 무협영화로서 이 자신의 세계를 대하는 마음 혹은 태도처럼 경험된다.

실내 장면에서도 바람은 이 무언의 무협을 표현하는 시선과 감정이다. 섭은낭(수치)이 사랑했던 남자 전계안(장전)을 침묵 속에서 훔쳐볼 때, 그녀 뒤로 움직이는 커튼의 실루엣이나 흔들리는 촛불의 형상은 고요하게 절제된 공기 속에서 쉽게 헤아려지지 않지만 쉽게 거둘 수 없는 정념을 길어낸다. 말없이, 예의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 섭은낭에게서 도저한 위엄과 한없는 슬픔이 느껴진다면 그 감흥은 전적으로 바람결에 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 때문이다. 외부의 무엇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는, 아니, 않기 위해 수없는 날들을 견뎌왔을 이 여인이 유일하게 어찌할 수 없는 흔들림. 바람결에 따라 움직이는 머리카락은 그녀의 말이나 행동보다도 더 깊게 이 여인이 겪고 있는 세상에 대해 말해주는 것 같다. 서사적 사건이나 인물의 관계와 무관하게 오직 바람이 불러일으킨 영화적 운동들만으로 이토록 생생한 울림을 빚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무협물에 무지한 내게 무협영화는 자객이 바람을 가로지르며 스스로 바람을 만들어 상대를 제압하고 죽이는 장면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은 해치워야 할 적의 동선이 아니라 바람결을 따라가기 위해 애쓰는 세계처럼 보인다. 마치 이 영화(의 카메라)의 시선이 시공간을 느리게 수평으로 움직이며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듯이 섭은낭은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공격과 살육의 세계로부터 멀어지려 하는 것 같다.

자객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요소들이 순리대로 움직이는 곳. 그 세상의 순리를 따르기 위해 자객의 운명을 짊어지고서도 최소의 행동만으로 버티던 여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결국 최소의 행동마저 멈추고 바람의 결을 따르기로 한 여인의 결심일 것이다. 단호하고 아름다우며 사무치고 숭고한 바람의 무협이 여기 있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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