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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간의 감정은 맹렬하였다

끝나지 않은 감정의 정체를 찾기 위해 촬영 현장에 돌아가 공간의 시간과 숨결을 응시한 장률의 영화 <필름시대사랑>
등록 2015-11-05 20:15 수정 2020-05-03 04:28

한 편의 영화 앞에서 보는 이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에서 비롯될까. 대개의 관객은 물론 많은 창작자들 또한 영화의 감정이란 그저 등장인물의 내면을 통해 형성되고 전달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다수의 상업영화들이 과장된 표정의 클로즈업을 남발하고 작위적 설정을 개입해서라도 인물들을 극단적 감정으로 밀어넣는 데 별 망설임이 없어 보인다면 그 때문일 것이다. 점점 더 많은 관객이 그런 영화들을 보며 별 이의 없이 감정적으로 호응하는 상황도 마찬가지 맥락에 있다. 하지만 감정이란 그렇게 일차원적으로 형상화하기에 얼마나 다층적이고 모호하며 무한한 영역인가. 영화와 감정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감정을 상투적이고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영화와 감정을 탐구하고 경험하려는 영화를 구별해야 한다.

스마일이엔티 제공

스마일이엔티 제공

(사진)은 굳이 분류하자면 후자에 속하는 영화다. 장률 감독은 노인영화제 개막작을 준비하며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박해일, 문소리, 안성기, 한예리 등이 등장하는 단편영화를 3일간 찍었다. 그런데 감독의 말을 빌리면 에피소드를 마무리한 뒤에도 그 공간에 대한 감정이 끝나지 않았고, 결국 그 정체를 찾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공간으로 다시 돌아갔다. 배우들이 등장하는 1부(‘사랑’) 이후에 이어지는 2부(‘필름’), 3부(‘그들’), 4부(‘또 사랑’)는 그렇게 완성됐다. 그중에서도 2부와 4부는 1부에 등장한 배우들 없이 그들이 머물렀던 자리와 병원 주변의 풍경만을 응시하고 탐색한다(3부는 이 배우들이 출연했던 영화인 의 장면들을 무성영화처럼 조합한다). 한때는 인물들의 감정으로 충만하던 공간에 인물들이 떠나고 나면 어떤 감정의 흔적이 남겨질까.

바람이 불고 적막하고 저절로 문이 열리고 무언가 불에 타오르고 시의 글귀와 주인을 잃은 사물들이 보인다. 마치 유령의 시선이 공간을 장악한 것 같기도 하고, 현재가 과거를 상념을 안고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여기서 본 것들이 무엇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것이 단순한 이미지의 나열이 아니라, 극적인 사건과 인물들 없이도 흐르는 공간의 시간과 숨결이라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영화적 울림이 가장 강렬한 4부에서는 1부의 인물들은 자취를 감추고 오직 사운드만 살아남아 1부의 행로를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1부와 4부는 서로 마주 보는 셈이지만 신기하게도 둘은 서로를 비추면서도 전혀 다르게 경험된다. 인물의 행동만을 좇던 우리의 눈이 인물의 이미지로부터 해방되자 그간 우리가 추상적이거나 부차적으로 여겼던 시간, 공간, 사물, 미세한 소리 등에 감각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니 주류 영화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 은 해석을 요구하는 난해한 영화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을 요구하는 영화라고 해야 온당하다.

제목을 통해 영화를 의미화하는 일은 대개의 경우 어리석지만, 이 영화의 제목이 ‘필름시대의 사랑’이 아니라 ‘필름시대사랑’이라는 점만큼은 짧게나마 언급하고 싶다. 이 제목은 왠지 ‘필름=시대=사랑’처럼 읽힌다. 실체가 사라져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무엇. 더 이상 실체를 만질 수 없어도 여전히 만져지는 감정의 흔적. 영화는 풍경과 사물과 공간이 인간 없이도 끊임없이 지속하는 무언(無言)의 감정적 시간을 응시할 수 있는 예술이다. 의 2부와 4부를 채우는 공간들은 인물들이 존재하지 않는 그저 텅 빈 풍경, 인물들의 서사에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 무용한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고요하지만 맹렬하게 살아 숨 쉬는 공간의 감정이다. 감정은 결코 인간에게만 귀속된 것이 아니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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