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역사적 기억과 폭력, 죽음 그리고 타자의 고통을 불러올 때,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보다 중요한 건 없다. 영화의 사회·정치적 의미나 궁극의 메시지는 영화적 재현의 문제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에 대한 질문이 형식적으로 영화 안에 기입되지 않은 작품은 제아무리 고귀한 의도를 품었다고 강변하더라도 의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영화가 다루는 역사적 내용이 아니라 그 형식이 던져주는 물음들만으로 영화를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시체처리반으로 일하는 주인공 사울의 시선과 행로만을 따라가는 영화다. 말하자면 은 노골적이고 집요한 형식으로 재현의 문제에 답하(고 있다고 믿)는 영화인 셈이다. 과연 그러한가?
1인칭 서사만을 볼 수 있는 탓에 마치 영화 전체가 한 장면 같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죽은 소년을 제대로 묻어주기 위해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고군분투하는 사울의 동선을 카메라가 뒤쫓는 동안, 화면 안에 담기는 것과 담기지 않는 것이 명확히 나뉜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건 죽어가는 사람들과 시체들의 이미지다. 죽음의 이미지를 가시화하는 대신, 영화는 죽음의 사운드를 팽창시켜 들려주는 선택을 한다. 아마도 이 영화를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타자의 고통을 이미지로 가시화하지 않는 이 선택이 정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쉬운 반론은 이것이다. 단지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윤리적 정당성을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화 안에서 시각적 영역의 물질화가 외설적일 수 있다면, 청각적 요소의 물질화에도 언제나 유사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조금 더 구체적인 반론도 가능하다. 이 영화는 타자의 고통을 함부로 재현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게 아니라, 카메라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즉 사울의 시선과 행로 ‘밖’에서 들끓는 타인들의 고통을 삭제하는 건 아닐까.
그러한 반문이 생기는 이유는 이 남자의 행동이 영화 안에서 충분히 설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죽은 소년이 남자의 아들인 것처럼 제시되지만, 후반에 이를수록 영화는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불투명하게 만든다. 달리 말해, 사울의 행동의 맹목성(아이를 묻어주기 위해서라면 그로 인해 다른 이들이 겪게 되는 폭력과 죽음에 그는 놀라울 정도로 무심하다)과 그걸 찍는 카메라의 맹목성에 비해 그 움직임의 이유는 납득되지 않는다. 사울과 카메라는 마치 초자아의 명령에 따라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나’의 시야만을 밀고 나아가는 자동기계처럼 경험된다.
설사 감독이 아이를 어떠한 영화적 상징으로 삼았다고 해도, 아니, 그랬다면 더더욱 은 역사적 비극으로 위장된 간교한 스타일의 영화에 다름 아닌 것 같다. 참혹하고 무자비한 역사적 순간의 수많은 개별 죽음들이 저 완고한, 그러나 의아한 1인칭의 서사를 지켜내기 위해 다시 익명의 흐릿한 시체 더미가 되어도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지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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