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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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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련한 입의 노래

압도적으로 체감되는 고통의 장면 <본 투 비 블루>를 말하는 이유
등록 2016-06-24 17:14 수정 2020-05-03 04:28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마약으로 무너져가던 재즈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는 할리우드가 제안한 자신의 전기영화에 출연하며 재기를 꿈꾼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마약 구입비를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괴한들에게 무차별적 폭행을 당하고 심각한 부상을 입는데, 트럼펫 주자로서는 치명적이게도 앞니를 모두 잃는다. 영화는 중단되고 뮤지션으로서 그의 삶은 거의 끝장난 것처럼 보인다.

그 벼랑 끝에서 한 장면이 등장한다. 틀니를 끼고 퇴원한 그는 트럼펫을 들고 욕조 안에 앉아 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입으로 안간힘을 쓰며 트럼펫을 불어보는데 제대로 소리가 나올 리 없다. 소리를 내기 위해 힘을 줄수록 그의 얼굴은 뭉개지고 입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진다. 저 불가능한 열망, 선혈이 낭자한, 이가 모두 빠진 뜨거운 입, 그 잇몸에 닿은 차가운 금속의 악기. 하지만 그는 자학과도 같은 행위를 그만둘 마음이 없어 보인다.

혼돈의 삶을 버텼던 위대한 뮤지션의 전기영화로서 는 평범하다 못해, 실망스러운 지점이 다분한 작품이다. 음악영화, 그중에서도 재즈 뮤지션을 다룬 영화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영화적 리듬감이 둔탁하고, 쳇 베이커의 굴곡진 삶과 내면에 대한 접근은 피상적이다. 무엇보다 재즈를 잘 모르는 내게도 느껴질 정도로 영화 속 연주 장면은 쳇 베이커의 음반을 들었을 때만큼 섬세한 감흥을 전달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엔딩 크레디트에 의하면 쳇 베이커의 실제 녹음들은 영화에 쓰이지 않았는데, 다소 의아한 선택이다). 음악으로서도, 영화로서도, 혹은 둘의 만남으로서도 어딘지 경직되고 밋밋하다는 인상이 팽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건, 앞에서 언급한 장면 때문이다.

그 장면의 물리적이고 압도적이며 뾰족한, 시각적이고 촉각적으로 직접 체감되던 고통의 덩어리는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고 끔찍하다. 이후 쳇 베이커가 거듭되는 훈련을 거쳐 기적적으로 다시 트럼펫을 연주하게 될 때조차, 피로 물든 앞선 장면은 그가 트럼펫을 입에 대는 순간마다 겹쳐진다. 심지어 그가 아무리 달콤하게 연인을 향해 노래를 불러도 동료들이 소녀 같다고 이죽거렸던 그의 얇은 목소리는 더 이상 여리고 순수한 선율로 들리지 않는다. 앞의 그 장면이 그의 목소리, 그의 트럼펫 연주에 새겨진 이상, 우리가 그 입의 처참하고 가혹한 역사를 알고 있는 이상, 그의 음악은 귀로 들리는 아름다움이기 전에 몸으로 다가오는 쓰라린 고통이다.

쳇 베이커의 삶의 이력에 무지한 상태에서 종종 도취돼 젖어들었던 그 음악을 이전의 방식으로 듣는 일은, 적어도 내게는 불가능해져버렸다. 담배와 마약의 환각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었던 입. 저 금관을 통과해 나오는 소리와 호흡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는 집요한 연습으로 고통을 딛고 미적 경지에 재도달한 어느 뮤지션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아프고 슬픈 입의 영화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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