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지는 않지만 화목하게 엄마, 아빠, 그리고 철부지 남동생과 함께 사는 선(최수인)은 집에서는 어른스럽고 다정다감한 딸이자 누나다. 하지만 학교에서 선은 왕따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아이들은 선을 따돌리고, 선의 시선은 언제나 애처롭게 그들을 향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선 앞에 전학생 지아(설혜인)가 나타나고 둘은 서로에게 마음을 활짝 열며 단짝이 된다. 그러나 막상 개학한 뒤, 지아가 학교에 등장하자 상황이 달라진다. 서로 다른 가정환경과 경제적 수준, 각자가 품고 있는 과거의 상처와 주변의 편견 어린 시선이 둘 사이를 가로막는다. 뜨거웠던 우정은 어느새 비겁한 폭로와 질투와 인정욕구로 얼룩진다. 또래들의 공동체 안에서 애타게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소녀들은 그 갈구가 깊어질수록 서로에게 발톱을 세우며 함께 다쳐간다.
아이들의 세계에 대한 순진한 감상을 허락하지 않는 이 영화에는 서사적 클라이맥스를 위해 영화적으로 학대당하고 착취되거나 순수 무결한 세계 속에 갇혀 향수의 대상이 되는 아이들이 없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성인배우들의 틀에 박힌 연기를 어색하게 답습하며 고함을 지르고 가짜 표정을 짓는 아역배우들도 여기 없다. 은 어른이 된 우리들의 과거 한때가 아니라, 그들만의 온전한 시간이며, 어른들의 이해를 바라는 세계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나가는 현재다. 개인적으로 조금은 뭉클한 마음으로 기억하고 싶은 장면 하나가 있다.
온갖 오해 속에 지아와 한판 싸우고 상처투성이가 된 선은 남동생과 마주 앉아 있다. 장난꾸러기 남동생은 연호라는 친구와 매일같이 레슬링을 하고 얼굴에 상처를 입고 온다. 오늘도 그의 눈은 벌겋게 멍들어 있고, 그 모습에 속이 상한 선이 묻는다. 대화의 내용을 옮기면 대강 다음과 같다.
“연호가 다치게 하는데 왜 같이 놀아?” 동생의 반문. “나도 때렸는데? 그래서 같이 놀았어.” 누나가 다그친다. “너 바보야? 너도 다시 때렸어야지!” 그러자 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나의 말이 이상하다는 듯 대꾸한다. “그럼 언제 놀아? 연호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또 때리고 또 때리고 그러면 언제 놀아. 난 놀고 싶은데.” 그 순간 선은 당황한 표정으로, 아니, 어딘지 슬픈 깨달음을 얻은 것만 같은 눈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지지 않으려고 때리고 복수하기 위해 때리다가 용서와 반성 따위의 거창한 이유를 들어 그만 때리는 세계가 아니라, 당신이 때렸으니 나도 때리지만, 함께 놀기 위해 결국 싸움을 중지하는 세계. 우리가 싸움을 멈춰야 할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아이들의 세상을 지배하는 잔인한 질서와 본능을 보여주는 이 냉정한 영화가 종종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건 이 어린 소년의 말에 밴 담백하고 솔직하며 활기 가득한 철학을 영화가 포기하지 않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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