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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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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즐거운 ‘돈의 반란’

상품권 형태의 지역 대안화폐 ‘공동체가게 이용권’ 사용하는 ‘완행열차 321 프로젝트’ 첫날 풍경
등록 2016-05-21 05:28 수정 2020-05-02 19:28
정용일 기자

정용일 기자

서울 마포구는 ‘돈의 반란’을 일으킬 수 있을까.

“4만원어치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5월11일 밤 9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 음식점 ‘두리반’에서 두 종류의 화폐가 오고 갔다. 하나는 전국 어디서나 유통되는 원화, 다른 하나는 마포구 30곳의 가게에서만 현금처럼 쓸 수 있는 ‘공동체가게 이용권’(이하 이용권)이다. 마포구 주민 위성남씨는 현금을 내고 이용권 4만원어치를 샀다. 서울 지하철 홍대입구역 앞 해산물 전문점 ‘나루수산’ 사장 김형길씨는 12만원어치를 샀다. 시범운영 기간인 두 달 동안은 4만원 이상을 사면 5% 이용권을 더 주기 때문에 위씨가 받은 이용권은 4만2천원, 김씨가 받은 이용권은 12만6천원이다.

공동체가게 30곳에서 쓰는 ‘이용권’

‘이용권’은 5월11일~7월13일 두 달 동안 마포구 공동체가게 30곳에서 실제 돈과 다름없이 쓰인다. 이용권을 쓰면 사용금액의 5%가 지역기금으로 적립되고, 기금은 마포 지역 주민을 위해 필요한 곳에 사용된다. 내가 쓴 돈이 어느 자본가의 배를 불리는지 까맣게 모르는 소비와는 사뭇 다르다.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지역화폐 실험 ‘완행열차 321 프로젝트’가 5월11일 닻을 올렸다.

‘완행열차 프로젝트’는 지난해 생긴 ‘마포공동체경제네트워크 모아’(이하 모아)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다른 경제를 꿈꾸며 시작한 여러 실험 가운데 하나다. 모아는 ‘지역에서 지역 구성원들이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경제체제를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시작됐다.

홍대입구, 연남동, 망원동 등이 있는 마포구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의 상징과 같은 지역이다. 예술과 삶의 영역에서 다양한 실험을 해오던 인디 예술가들과 중소 상인, 지역 주민들이 구축한 자생성과 창의성은 너무 쉽게 자본에 빼앗기고 밀려났다.

하지만 마포는 합정동 홈플러스 입점 저지 투쟁 과정에서 시장 상인들과 주민들이 힘을 모아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등을 만들어냈고, 재개발로 맥없이 철거될 뻔했던 국숫집 두리반을 ‘예술적 반철거점거운동’의 현장으로 만든 승리의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자본의 폭력에 저항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경제주체로 서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모아다.

이들이 대안화폐로 고안한 이용권은 현금 혹은 우리가 즐겨 쓰는 신용카드나 체크카드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를까. 이용권은 1천원권, 5천원권, 1만원권으로 발행된다. 현금이나 여느 상품권처럼 현금영수증 발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또 원화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같다.

가장 다른 점은 발행 주체다. 원화의 발행 주체는 한국은행이지만, 이용권의 발행 주체는 모아다. 디플레이션 시대 공동체 생존 전략으로 세계의 다양한 대안화폐를 소개한 문진수 한국사회적금융연구원장이 그의 책 에서 안내한 대로다. “없으면 만들어 써라.”

또 하나 다른 점은 지역에서 쓴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게 아니라, 지역을 살리는 일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2~3%에 해당하는 카드 수수료가 카드회사로 흘러 들어가지만, 이용권을 사용하면 5%의 적립금이 ‘지역기금’으로 쌓인다.

나의 소비 행위가 내 삶과 크게 직결되지 않는 대기업 자본가의 배를 불리는 대신, 내가 사는 지역, 내가 아는 이웃의 이윤이 된다. 가게 사장은 그 가운데 5%를 다시 지역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한다는 점에서 이용권을 사용하는 행위는 ‘능동적 소비’다.

느리게, 하지만 즐겁게
서정래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 상인회장이 5월11일 음식점 ‘두리반’에서 ‘공동체가게 이용권’을 사고 있다. 정용일 기자

서정래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 상인회장이 5월11일 음식점 ‘두리반’에서 ‘공동체가게 이용권’을 사고 있다. 정용일 기자

‘완행열차 321 프로젝트’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대안화폐’의 가치에 공감하는 30곳의 공동체가게에서 2천만원의 이용권을 두 달 동안 유통해 100만원의 지역공동체기금을 적립한다는 의미다. 서민들을 태운 완행열차처럼 느리지만 즐겁게 목적지까지 가자는 뜻에서 ‘완행열차’라 이름 붙였다.

그러나 국가가 공인한 돈이 아닌 ‘우리가 직접 만들어 일부에서만 유통되는 돈’을 선뜻 받고 물건을 파는 데는 불안과 기대가 교차한다. 마포구 성산동에서 착한 재료를 쓰고 수익금 일부를 지역 빈곤층 등에 기부하는 ‘키다리아저씨 빵집’ 오너셰프 김생수씨는 조금 불안하다. 동화 속 키다리아저씨와 키는 다르지만, 남몰래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은 같은 그는 “두 가지 화폐를 이용하는 것이고, 이게 잘될지 안 해본 거라 불안한 점이 조금 있다”면서 “그래도 30곳 넘는 가게들이 참여하고, 현금으로 환전이 잘되고, 또 이용권의 5%가 지역기금으로 적립된다는 점에서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이용권 사용 공동체가게에 함께하기로 한 홍대입구역 근처 ‘예본치과’의 정달현 원장은 새로운 실험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크다. 마포 지역 주민들이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찾아나가고 제공하는 복지 비정부기구(NGO) ‘마포희망나눔’ 대표이기도 한 정 원장은 “기존 화폐는 우리가 사는 지역을 넘어 다른 국가로 이동해가며 오히려 지역경제의 토대를 무너뜨린다”며 “경제활동을 통해 지역에서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대안화폐의 여러 실험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이용권을 화폐처럼 받겠다고 약속한 가게들은 앞서 소개한 빵집과 치과, 식당을 비롯해 약국, 동네서점, 친환경 식자재와 생활재를 판매하는 생협, 치킨집, 커피숍 등 다양하다(하단 지도·표 참조). 원래 조합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울림두레생협 용강점·성산점 2곳은 ‘완행열차 321 프로젝트’ 시범운영 기간인 두 달 동안 이용권을 가져가면 조합원이 아닌 사람들도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망원시장 상인회는 회의를 거쳐 이곳 외에 적어도 10곳, 혹은 망원시장 상인회 소속 가게 전체가 이용권을 받는 ‘공동체가게’로 참여하는 방안을 결정한다. 서정래 망원시장 상인회장은 “시장 상인들은 이미 온누리상품권을 통해 영업하고 있기 때문에 ‘이용권’에 대해 큰 거부감이나 낯섦이 없다”며 “오히려 시장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용권을 받는 공동체가게 명단은 5월23일 마포공동체경제네트워크 모아 홈페이지( www.mapo.network)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비의 공간과 관계를 건강하게
오김현주 민중의집 대표가 이용권을 어디에 사용할지 ‘소비계획서’를 쓰고 있다. 소비계획서를 통해 소비를 늘리지 않고, 소비 공간을 바꾸는 것으로 ‘능동적 소비’를 할 수 있다. 정용일 기자

오김현주 민중의집 대표가 이용권을 어디에 사용할지 ‘소비계획서’를 쓰고 있다. 소비계획서를 통해 소비를 늘리지 않고, 소비 공간을 바꾸는 것으로 ‘능동적 소비’를 할 수 있다. 정용일 기자

이용권을 쓴다고 소비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기존 사용처에 쓰던 액수만큼 쓰되, 소비의 공간과 관계만 바꾸는 것이다. 가계금융 역량강화 상담 등의 활동을 하는 한선경 ‘괜찮아요 협동조합’ 대표는 “그동안 대형마트에서 장을 봤다면, 그 습관을 조금 바꿔 생협이나 망원시장에서 장을 보고, 커피를 마실 때도 아무 카페가 아니라 이용권을 받는 카페를 가는 방식으로 소비 공간을 바꾸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소비자에게도 유용하다. 치과에 갈 때, 잘 모르지만 단지 가까워서 혹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반신반의하며 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고 지역 활성화에 대한 가치에 공감하는 공동체가게 중 하나인 치과에 가게 되면 ‘과잉 진료’나 ‘바가지 진료’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 있다. 한선경 대표는 “동네에 믿을 만한 가게, 병원, 의사가 생긴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고은주 울림두레생협 상무이사도 새로운 관계 형성에 대한 기대감을 표했다. 고 이사는 “늘 가던 곳만 갔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공동체가게 30곳을 순례해볼 생각”이라며 “나와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의 공간과 관계를 넓혀나가는 일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용권을 받는 ‘상인’의 입장에서도 관계가 넓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용권을 계기로 조합원이 아닌 소비자들도 접하게 되는데, 어떤 분들이 올까 기대된다.”

지역기금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두리반을 운영하는 유채림 작가는 “이용권 적립금으로 홍대 앞 수많은 가난한 인디 뮤지션이 마음 놓고 공연할 수 있는 공간, 너무나 훌륭한데 상영관을 못 찾아 묻혀버리는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물을 자유롭게 상영할 수 있는 공간을 꼭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시범기간 동안 발행되는 이용권은 2천만원이다. 이용권은 공동체가게 30곳 가운데 거점으로 삼을 수 있는 서교동의 두리반, 망원동의 카페M, 염리동의 지역카페 나무그늘, 마포 지역운동의 거점인 마포 민중의집 등에서 판매한다.

“실험을 거쳐 불편함은 고칠 것”

‘완행열차 321 프로젝트’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윤성일 모아 상임대표는 “독일 바이에른주 킴카우어 지역의 지역화폐 ‘킴카우어’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완행열차 프로젝트’의 이용권과 거의 유사하다”며 “2003년 시작한 킴카우어 지역화폐는 지금 630곳의 가맹점에서 3600명이 사용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지역화폐를 유통하는 가게는 고정 고객이 생기고, 고객은 이 돈이 지역 안에서만 돌며 지역경제를 살리기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하고 좋아하면서 점점 지역화폐가 확대되는 추세라는 것이다.

모아 회원이기도 한 오김현주 민중의집 대표는 “이번 시범기간은 마포의 지역화폐가 활성화되기 위해 고쳐나가야 할 점은 뭔지, 불편한 점은 뭔지 다각도로 모색하고 실험하는 기간”이라며 “이용권은 이 실험을 거쳐 여러 단점을 고쳐가며 안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리반은 ‘완행열차 321 프로젝트’ 닻을 올리는 파티를 여는 데 사용된 식사와 술값 19만6천원을 모두 이용권으로 받았다. 9800원이 지역기금으로 적립된다. 이번에 발행한 이용권 2천만원이 모두 유통되면 100만원의 지역기금이 적립된다. 두 달 뒤, 마포는 100만원이라는 소중한 종잣돈을 어디에 쓸지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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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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