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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지 않은 시대’에 불복종 선언

행동주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불의에 맞서는 법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등록 2016-02-17 20:39 수정 2020-05-03 04:28

갓 태어난 쌍둥이는 그렇게 죽었다.

산부인과에 하나뿐인 인큐베이터는 ‘백인 전용’이었고, 아기들의 피부는 검었다. 1946년, 미국 조지아주 소도시 포사이스. 이 도시의 보안관 클로드 스크루즈는 곤봉으로 흑인 수감자의 머리를 수차례 때려 숨지게 했다. 공권력이 자행한 ‘인종 살인’이었다. 6개월 징역형을 받은 스크루즈에게 대법원은 “죄수의 헌법상 권리를 박탈할 의도가 없었다”며 유죄판결을 뒤집었고, 이후 그는 조지아주 의회 의원이 됐다.

1960년대에도 미국의 인종차별은 일상이었다. 백인과 구분짓기 위한 흑인 전용 대학이 있었고, 강도 사건 때마다 흑인들이 용의자로 몰렸다. 경찰은 무고를 주장하는 흑인 소년을 발가벗기고, 콘크리트 바닥에 내던진 뒤, 가죽 채찍과 주먹, 곤봉으로 때렸다. 길거리에 널린 백인 전용 의자에 흑인이 앉으면 곧바로 철창에 가뒀다. 부당함에 저항하는 흑인들에게 백인들의 욕설과 린치가 가해졌다. 백인의 총격으로 흑인이 사망한 사건은 경찰이 무마했다.

저항운동은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됐다. “공공 도서관에서 인종 분리에 관해 뭔가를 해보면 어떨까?” ‘흑인 전용’ 스펠먼대학에 부임한 신참 백인 교수 하워드 진(1922~2010)은 학생들에게 ‘앉아 있기 운동’을 제안했다. 애틀랜타 주요 도서관에서 흑인 학생들이 백인 전용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방식의 ‘비폭력 습격’이다. 진은 학생들에게 “달리는 기차에서 중립은 없다. 역사가 잘못 흘러가고 있을 때 중립을 지키는 것은 그 잘못에 동조하는 행위”라고 가르쳤다. 진은 흑인들과 백인 전용 의자에 어울려 앉아 정부에 “보편적 자유”를 요구했다. 진의 아내 로즐린은 지역 극단의 뮤지컬 에 출연해 ‘시암왕’ 역을 맡은 흑인 미식축구 선수와 멋진 댄스를 췄다. 백인 점원들은 앞치마에 “안 돼!”(never)라는 문구를 새겼고, 경찰의 강제 연행과 체포, 백인들의 린치, 살해 위협이 이어졌다. 그러나 앉아 있기 운동은 극장, 법원, 버스로 확산됐다. 흑인들은 본격적인 투표권 행사를 시작으로 집단적 정치 참여에 나섰다. 진은 “가난과 인종차별에 대한 최후의 승리가 여전히 멀리 있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진의 저항은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의 참여로 이어졌다. 그의 곁에 ‘세계적 지성’ 노암 촘스키가 함께했다. 반전 시위에 제동을 걸던 정부에 시민들은 불복종 운동으로 맞섰다. 불과 수백 명으로 시작한 반전 운동은 최대 50만 명의 군중 집회로 번졌다. 여론의 큰 물줄기도 결국 반전으로 돌아섰다.

하워드 진은 세계적인 행동주의 역사학자이자, 미국 보스턴·프랑스 파리 대학 교수, 반전·인권 운동에 앞장선 사회운동가였다. 그는 거대 권력의 폭력에 맞서는 태도를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우화로 빗대 설명했다. “홀로 사는 한 남자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본다. 강력하고 무장한 폭군이 문 앞에 버티고 선 채 묻는다. ‘복종할 테냐?’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폭군이 들어와 집을 차지한다. 남자는 몇 년이고 그의 시중을 든다. 폭군은 독극물이 든 음식 때문에 수수께끼처럼 병에 걸린다. 그는 죽는다. 남자는 문을 열더니 시체를 치우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는 단호하게 말한다. ‘복종하지 않겠다.’”

책은 1994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됐고, 국내에 2002년 번역 출간됐다가 이번에 개정판이 나왔다(이후 펴냄). 책에서 유일하게 글자를 키워 강조한 단어가 ‘좋지 않은 시대에’(384쪽)다. 출판사 쪽은 “지금 우리의 현실은 하워드 진이 이 책을 쓸 당시의 불합리, 부족한 정치적 자유, 희망을 갈구하는 대중의 우울한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개정판을 낸 이유를 설명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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