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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겨야 대학 가고, 이겨서 돈 번다, 그러니 때린다

구타와 도박으로 얼룩진 한국 스포츠 ‘한계상황’… 운동부를 해체하라
등록 2016-01-20 22:15 수정 2020-05-03 04:28
후배를 폭행한 사재혁(왼쪽)과 불법 도박을 저지른 임창용(오른쪽).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괴물이 아니라 결국 실패의 길로 가고 있는 한국 스포츠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일지 모른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한겨레

후배를 폭행한 사재혁(왼쪽)과 불법 도박을 저지른 임창용(오른쪽).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괴물이 아니라 결국 실패의 길로 가고 있는 한국 스포츠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일지 모른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한겨레

해방 이후 한국 스포츠가 이룬 ‘스펙터클’(spectacle)은 환상 그 자체다. ‘88 서울올림픽’과 ‘2002 월드컵’으로 대변되는 성공의 기억들은 현대사의 변곡점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사건적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면 존재하지 않았어야 했다. 믿을 수 없음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역설의 모래성 위에서 한국 스포츠는 일체의 반론을 허락하지 않은 채 그들만의 성채를 쌓았다.

‘결과만 좋으면 다 좋은 것’이 되고 마는 한국적 허위는 스포츠 영역에서 반박 불가능한 진리로 추앙된다. 닿을 길 없는 성공을 열망하는 개인들을 향해 스포츠는 순수하게 땀과 열정을 불사르기만 하면 언젠가 당신도 세계와 싸울 수 있지 않겠느냐는 그럴싸한 허황됨을 설파한다.

검색어 1위 악당이 된 ‘스타들’

객관적 논박을 시작하기만 하면 금방 무너질 것 같은 궤변들은 희한하게 그럴 때마다 어떤 ‘쾌거’들이 이어지며 유지 강화됐다. 뭘 해도 안 될 것만 같던 시절, ‘하면 된다’를 외치며 건설된 스포츠의 골조는 해체는커녕 별다른 보수 없이 세기를 건너왔고, 이미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었어야 할 악습은 오늘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스포츠를 지배한다.

‘도박’과 ‘폭력’이라는 유령이 스포츠를 배회하고 있다. 임창용, 오승환 그리고 사재혁까지. 스포츠 스타들이 연말연시에 함께 검색어 순위에서 뒹굴었다. 지금이야 악당으로 전락해 공론장의 단죄를 받고 있지만, 한때 반박 불가능한 존재들이었고 믿을 수 없는 쾌감을 전했던 이름들이다.

이른바 ‘정킷방’이라는 불법 도박장에서 승부를 겨뤘던 임창용과 오승환은 국내 리그에서 시즌의 절반을 뛸 수 없는 징계를 받았다. 세계에서 가장 바벨을 잘 들던 사내는 후배의 광대뼈를 함몰시킨 파렴치한이 되어 10년 자격 정지라는 사실상 퇴출 선고를 받았다. 임창용과 오승환은 이미 약식이나마 법의 처분을 받았고, 사재혁은 아직 법의 처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응당 그러려니 아무 일 없단 듯 갈 길을 가거나, 잠깐 자세를 낮추고 훗날을 도모하고 있다.

비단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2년6개월여 전에는 한국 농구가 낳은 최고의 판타지 스타 가운데 한 명이었던 강동희 전 원주 동부 감독이 무려 ‘플레이오프’에서 승부를 조작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영구 제명됐다. 지난해 9월에는 한국 농구의 향후 10년을 이끌 대들보로 평가받던 김선형(SK)과 오세근(KGC)이 한낱 푼돈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불법 도박 및 승부 조작에 손대는 풋내기들이란 게 드러나기도 했다. 어제의 판타지 스타와 내일의 판타지 스타가 모두 승부 조작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자 프로농구는 아예 종목의 존폐 위기가 들먹여졌다.

그나마 들으면 알 만한 이름들의 문제는 드러나기라도 한다. 최고의 사학 명문들에서 주기적인 체대 입시 비리가 발생하지만, 그때뿐이다. 국가대표 선발에 일상적으로 돈이 오간다는 고발이 이어져도 그러려니 한다. 소속팀 여자 선수들을 술자리로 불러 시중을 들게 하고 성추행까지 했던 한 감독은 고작 자격 정지 1년의 징계를 받고 이후 다른 여자팀으로 복귀해 오늘도 지도인지 지랄인지 모를 가르침을 내린다.

프로에서 아마추어까지, 학원 스포츠와 생활 스포츠까지 가릴 것 없다. 체육계 스스로 ‘4대 악’(승부 조작·편파 판정, 폭력·성폭력, 입시 비리, 조직 사유화)을 호명했지만, 해소된 것은 없다. 늘 같은 돌부리에서 같은 자세로 엎어진다.

‘입시’가 스포츠에 남긴 상흔
지난 1월8일 서울 홍익대 앞 ‘미디어카페 후’에서 한국 스포츠에 대해 가장 냉정한 조언을 해온 전문가 4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왼쪽부터 정희준 동아대 교수,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용철 서강대 교수, 정재용 KBS 기자. 정용일 기자

지난 1월8일 서울 홍익대 앞 ‘미디어카페 후’에서 한국 스포츠에 대해 가장 냉정한 조언을 해온 전문가 4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왼쪽부터 정희준 동아대 교수,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용철 서강대 교수, 정재용 KBS 기자. 정용일 기자

침몰하겠구나 하면 난데없이 사건적 순간이 발생하고, 그 환상에 도취된 채 문제가 봉합되는 주기의 반복. 그 불행한 서사를 한국 스포츠가 끊어낼 방법은 정말 없을까. 문화체육관광부가 사재혁 선수 파문에 대한 대책을 발표하고,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임창용·오승환 선수의 징계를 결정했던 지난 1월8일, 이 한국 스포츠에 대해 가장 냉정한 조언을 해왔던 4명의 전문가들을 팟캐스트 (정기독자 꼬시고 싶은 방송)에 불러모았다.

의 저자로 기자들 중에선 독보적이고 지속적으로 학원 스포츠 문제를 고발해왔던 정재용 KBS 기자는 “한계상황이다”는 말로 시작했다.

정 기자는 사재혁 선수 폭행 파문이 “국가에서 관리하는 한국 스포츠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태능선수촌에서 시작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소수 엘리트 선수만을 육성하며, 경기력을 중심으로 경쟁력을 갖추는 패러다임의 스포츠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예외자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스포츠계 전반에 ‘폭력’이 만연한 상황이라 사재혁 파문이 오히려 “조마조마하다”고까지 진단한 정 기자는 “판을 바꾸는 변화를 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체육계 안팎에서 ‘대한체육회가 가장 싫어하는 교수’로 꼽히는 정희준 동아대 교수는 “문제가 밝혀지면 징계하지만, 그때뿐인 면피용 휴가성 징계가 남발돼왔고, 언론도 이를 묵인해왔다”며 그러다보니 팬들의 심정 역시 “운동선수들이 그렇지 뭐, 하는 자포자기”로 고착됐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사회 전체가 운동부 전체를 깔아보는 시선 속에서 스포츠계의 폭력이 자라고 아무렇지 않게 확장된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수업 시간에 종 치면 교실로 들어와서 ‘서 있는 놈 나와’ 하고 불러내 따귀부터 때리고 시작하는 선생님을 생각해보라”며 “분위기는 당연히 가장 빠르게, 한 방에 평정된다. 한국 스포츠의 지도법이 딱 그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능력 없고 게으른 선수들에게 신경 쓰기 싫어하는 지도자들이 때리는 것에서 지도력의 효용성을 찾는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때리면 안 된다는 근대 이후의 상식적 질서가 유독 스포츠 영역에서만 너무 쉽게 간과되는 것은 아닐까. 이를 정희준 교수는 “기본적으론 한국 사회 특유의 입시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어떻게든 성적을 내야 하는 감독들이 정신력을 강조하고, 정신력으로도 안 되면 때리고, 그렇게 때렸는데 어쩌다 이기기라도 하면 아예 그게 구조로 자리잡는 악순환이 수십 년째 반복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입시제도의 지배력 때문이란 지적이다.

자식의 미래를 담보로 맡겨놓고, 운동을 시키는 부모들은 폭력의 악습을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최후까지도 끝내 용인한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건 당장 맞더라도 좋은 성적을 내서, 자식이 대학에 진학하거나 프로팀에 가는 것뿐인 형편에서 설령 폭력이 불합리한 수단임을 인지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올림픽은 기쁨을 주지 않는다
농구선수 김선형(왼쪽)은 승부조작 파문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팬들에게 사과했다. 야구선수 안지만은 해외 원정 도박혐의로 경찰 수사 중이다. 연합뉴스

농구선수 김선형(왼쪽)은 승부조작 파문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팬들에게 사과했다. 야구선수 안지만은 해외 원정 도박혐의로 경찰 수사 중이다. 연합뉴스

학원 스포츠 현장 취재 경험이 많은 정재용 기자는 한발 더 나아가 “학원 스포츠가 입시만을 절대적이고 절박한 지상 과제로 하는 상황에서 부모들을 길들이기 위해 일부러 때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 기자는 “한겨울에 전지훈련을 데려가 죽기 직전까지 학생들을 찬 바닷물에 입수시키는 것이 아직도 현실”이라며, 한국 스포츠는 “‘이겨서 대학 간다, 이겨서 군대 안 간다, 이겨서 연금 받는다’는 단출한 3가지 환상으로 유지된다”고 지적했다. 이 환상 속에서 한국 스포츠는 오늘도 때리면서 이기라고 다그치고, 그래도 안 되면 입시 비리를 저지르고, 그러다가 승부까지 조작하며 굴러가고 있다.

수단과 방법이 모두 폭력으로 귀결되는 고립된 섬에서 길러진 폭력 감수성은 성인이 되고 자기 운동을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도 지워지지 않는 각인과 행동 양식으로 남게 된다.

‘역도 영웅’ 사재혁 선수의 폭행은 대표적 사례다. 폭력을 통해서라도 선후배 간의 규율을 잡고 위계를 유지하는 것이 승부에 도움이 된다는 공감대 속에서 폭력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알아도 눈감고, 때때로 장려되기까지 한다.

이런 풍토를 쇄신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가장 지적인 스포츠 칼럼을 쓰는 평론가 중 한 명인 정윤수 문화평론가는 워낙 답답한 상황이어서 그런지 조금 색다른 제안을 했다. 스포츠의 사회적 역할을 재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 평론가는 “올림픽이 있는 해가 시작되면, 지상파 방송들이 앞장서 ‘올림픽에서 온 국민에게 기쁨을 주겠다’는 뉘앙스의 신년 계획을 말하곤 하는데, 이런 것부터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정 평론가는 “엘리트 스포츠를 성적과 국위 선양의 도구가 아닌 삶의 윤활유 차원에서 문화적으로 완전히 재규정할 수 있는 상상력과 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희준 교수는 더 현실적인 진단을 내렸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징계,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원 스트라이크 아웃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근본적으로 지도법을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운동을 하는 아이들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대학 가기 위해서, 안 맞기 위해서’ 운동하는 한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다”며 때리지 않으면서도 엘리트 스포츠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해외 국가들의 경우 중뿔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 시간이 “칭찬해주는, 포지티브 피드백을 절대적으로 부여하는 시간”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도자들이 동기부여를 전혀 다르게 하는 형태로 바뀌어야 한단 주장이다.

결국, 문제가 발생하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엄벌하는 시스템의 확립과 학원 스포츠의 철학을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윤수 평론가는 “운동부 아이들이 고립된 섬이 아닌 또래의 일상에 섞여 있어야 한다”며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감독과 코치들 밑에서 얻어맞아도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운동하는 기계로 아이들이 훈련”되는 상황에선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휘발될 것이란 지적이다.

스포츠심리학을 전공한 정용철 서강대 교수는 “임창용이나 안지만 같은 스타급 선수들이 도박에 빠지는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훌륭한 선수가 괴물이 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일탈을 한 것이 아니라 블랙홀 같은 입시를 통과하기 위해 수없이 맞으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을 내면화한 인격을 가진 선수들이 결국 실패로 향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선수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왜 우리 사회는 수십 년째 이렇게 작동할까를 고민”해야 문제를 직시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칭찬해주는 지도 방식이 해결책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경쟁자를 이기고 더 좋은 상급 학교와 팀에 진학하는 것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조련돼온 아이들. 그 아이들의 어떤 이름이 운동선수일 뿐, 그건 결국 한국 사회가 익숙하게 은폐해온 잔인함의 단면에 불과할지 모른다.

1년 내내 합숙소에서 생활하며 강압적 규율 밖의 질서와 문화를 익히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리고 마는 ‘우리들의 문제’에 우리는 진심으로 공감하고 해결을 모색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임창용, 오승환 그리고 사재혁의 실패에서 우리가 다시 마주해야 할 뼈아픔은 특별한 무엇이 아니다. 아주 나쁜 그리고 오래된 악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온 익숙한 침묵과 암묵적 동조에 대한 성찰 그뿐이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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