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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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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거면 차라리 버려

최소한의 것으로 생활하는 미니멀리스트의 삶 권유하는 책 열풍… 버리니 비로소 행복해지네
등록 2016-01-14 18:14 수정 2020-05-03 04:28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의 저자 사사키 후미오의 방. 텅 빈 방에 작은 테이블 하나만 놓아두었다. 비즈니스북스 제공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의 저자 사사키 후미오의 방. 텅 빈 방에 작은 테이블 하나만 놓아두었다. 비즈니스북스 제공

정리 컨설턴트에게 ‘정리의 기술’을 전수받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술 이전은 실패했다. 모든 것을 사각형으로 만들어 정돈하라는 법칙이 있었다. 아직까지 유용하게 사용하는 유일한 기술은 속옷을 아주 작고 반듯한 사각형으로 접어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놓는 것이다. 이로써 서랍 속 공간을 확보한 나는 더 많은 속옷을 사서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팬티를 몇 장 더 가진다고 삶이 행복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 허한 기분이 들면 사기 쉽고 작은 물건들을 사서 마음을 달래곤 했다. 이런 빈껍데기뿐인 물질적 풍요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최근의 정리 관련 서적들은 ‘차라리 버리라’고 외친다.

무소유의 즐거움?

가진 물건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고 있다. 가진 것을 버리고 소비를 줄이기 권하는 책들도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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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출간된 는 출간 20여 일 만에 11번째 인쇄본을 찍으며 베스트셀러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등 유사한 성향의 책들도 순위권에 올라 있다.

온라인서점 ‘알라딘’ 경제경영 담당 MD 홍성원씨에 따르면, 2012년 베스트셀러인 등이 판매되던 때와 비교할 때, 최근 경향의 특성은 이런 유의 책이 동시다발적으로 순위에 올라 있다는 점에 있다.

를 필두로 등이 자기계발 베스트 상위권에 포진해 있다. 관련 서적들 중 몇몇은 출간된 지 오래됐지만 최근 추세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프로모션을 준비할 정도다.

정리 열풍이 세계적 추세라는 지적도 있다. 일본에서 2011년, 국내에서 2012년 베스트셀러였던 곤도 마리에의 은 현재 미국 아마존 판매 종합 1위를 기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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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열풍은 경제불황과 궤를 같이한다. 오랜 불황과 대지진까지 겪은 일본에서 이 바람이 시작됐다. “스테디셀러 도 저자 도미니크 로로가 오래 일본에 거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 한 차례 일본발 정리 열풍이 몰아쳤던 2012년은 전·월세 가격 폭등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혜민 스님의 이 서점가를 지배했다. 이후의 상황은 여기서 더 나아지기는커녕 세월호, 메르스, 저금리, 저성장, 희망퇴직 등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홍성원 MD의 설명이다.

최근 출간된 와 는 입을 모아 물건을 줄이자 삶의 태도도 달라졌다고 말한다. 의 저자 사사키 후미오는 이렇게 썼다. “나는 장래에 대해 불안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사양 산업인 출판을 직업으로 선택했고, 편집자로서 그다지 잘나가지도 못하고 업무의 폭은 좁았다. 여차하면 이 자리마저 잃을 것만 같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독사뿐인가?” 그는 언젠가 사용할지 모를 물건을 버리면서 ‘언젠가’라는 미래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현재에만 집중하면서 두려움과 걱정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억대 연봉을 받는 직장을 그만두고 좋은 자동차와 집을 모두 팔아치운 뒤 더 행복해졌다는 의 저자 미국의 조슈아 필즈 밀번과 라이언 니커디머스는 덜 소비하는 대신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물건을 버리고 기록하는 사람들
도미지씨는 필요 없는 물건의 마지막 사진을 찍고 버린다(위 두 사진). 강현양씨는 버리는 물건의 마지막 순간을 그림으로 남긴다. 아무리 써도 끝까지 쓰기 힘든 필기구, 충동적으로 구매한 원피스 등이 그것이다. 위부터 도미지, 강현양 제공

도미지씨는 필요 없는 물건의 마지막 사진을 찍고 버린다(위 두 사진). 강현양씨는 버리는 물건의 마지막 순간을 그림으로 남긴다. 아무리 써도 끝까지 쓰기 힘든 필기구, 충동적으로 구매한 원피스 등이 그것이다. 위부터 도미지, 강현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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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된 풍요에 억눌려 피로감을 느꼈던 사람들이 행복을 찾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최소한의 물건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시류에 영향받아 개인 블로그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정리한 물건을 기록하거나 미니멀리스트로서의 일상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강현양(33)씨는 SNS에 자신이 버린 물건들을 그림으로 그려 올린다. 10개월째 가진 것들을 팔고 버리며 정리 중인 그는 최근 100번째 그림을 업로드했다. 강씨는 처음 물건을 버리기 시작했을 때 이것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까 구체적으로 상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집이 정리되고, 점차 무언가 치우고 정리할 것이 줄어들면서 스트레스도 줄었다고 전한다. 소비도 신중해졌다. 가지지 못한 것에 안달복달하거나 절제하지 못하고 충동구매를 하는 성향이 점차 사라졌다.

그가 그린 100번째 그림은 7년 전 우울했던 어느 날 기분을 달래려고 산 원피스다. 그는 그림을 보내주며 이렇게 설명했다. “버리기 시작하기 전에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인터넷 쇼핑으로 울적한 기분을 누르곤 했다. 그런데 이내 매력이 사라져버리는 물건은 결국 짐이 됐다. 또 다른 자극을 원했고 물건은 계속 늘어갔다. 이제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지 않는다.”

온 집 안을 차지했던 물건들이 한 장의 종이에 혹은 디지털 공간에 몸을 축소해 저장된다. 동화작가 선현경씨는 이런 방식으로 버린 물건에 대한 기록을 모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상자 기사 참조). 블로그에 미니멀 라이프 일기를 쓰는 도미지(32)씨 또한 자신이 버린 물건들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한때 너무 갖고 싶었지만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이 된 디지털 카메라, 친구가 사준 시계, 너무 빨리 ‘최신’으로부터 멀어져버린 커플 휴대전화 등이 그것이다. 먼지 쌓인 상자를 들추며 언젠가 의미 없이 소각될 물건들을 정리한다.

미지씨는 물건을 버리기에 앞서 자신을 억누르던 가장 크고 무거운 것을 정리하기도 했다. 대기업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는 직업을 버렸다. “이걸 이루기 위해서 혹은 갖기 위해서 내가 노력해왔던 게 얼마인데,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덜 일하고, 덜 소비하고,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지 않고 지금 더 행복해지는 방법을 택했다.” 버리는 사람들은 비우는 만큼 더 소중한 것들로 일상이 채워진다고 느낀다.

삶의 긴축 정책으로 행복 찾아나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필요조건으로 비우기를 내세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는 “인생의 로드맵이 없는 시대, 삶의 의미를 찾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한때 불었던 인문학 열풍과도 비슷한 이유인데, 우리는 과거처럼 자식을 키우고 노후를 설계하는 삶을 더 이상 살 수 없다. 사회가 긴축 분위기이니까 삶의 방식도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다.”

삶의 긴축 정책, 버리는 것 말고는 더 이상 삶을 설계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많은 물건에 둘러싸여 있지만 충족한 감정을 손에 쥘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일상 속에서 우리는 버림으로써 오히려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저자  선현경씨  인터뷰


“물건을  버리자  마법이  일어났다”


일러스트레이션/ 선현경·예담출판사 제공

일러스트레이션/ 선현경·예담출판사 제공


끝끝내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는 없었지만 하루 하나 버리기, ‘1일 1폐’를 실천해온 이가 있다. 동화작가 선현경씨는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의 부류에 속했다. 친구들은 저장강박증을 겪는 사람들의 예를 그에게 보여주며 경고하기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사고 싶은 물건에 목마르지만 한편으로 매일 작은 것들을 하나씩 버리면서 변화를 겪었다고 말한다. 불필요한 것을 소비하지 않는 태도, 물건과 함께 고여 있던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기술이 생겼다고 했다. 만화가인 남편 이우일씨, 그리고 딸과 함께 미국에 머물고 있는 선현경씨와 전자우편으로 인터뷰를 주고받았다.
버리기를 결심했을 때 가장 눈에 걸렸던 풍경은 무엇인가.
집에 있는 모든 풍경이 거슬렸다. 우리 집에는 빈 벽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모든 벽에 책장이 있고 책 앞에 또 다른 책, 그 앞에 장난감이 놓여 있었다. 빈 공간이 없었다. 뚜껑 사이로 삐져나온 것이 보일 정도로 차고 넘치는 양말통을 보았다. 멀쩡해서 버리지 못했지만 절대 안 신는 양말들, 그 양말을 한 번씩 신고 버려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그냥 버리기는 미안해 그림을 그려두자 마음먹었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치료하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나만의 처방전이었다.
버린 물건 중 가장 속시원했던 것, 그리고 가장 머뭇거렸던 것을 하나씩 꼽아본다면.
가장 머뭇거린 것이 하나 있는데, 다 해진 천가방이었다. 결혼 전 캐나다에서 1년 지냈는데, 진짜 어렵고 힘들었던 그 시절 망설이며 사서 열심히 들고 다녔다. 천을 덧대어 꿰매서 쓰기까지 했는데, 그때는 점점 예뻐지는 느낌이었다. 한참 잊고 살다가 다시 보니 완전히 걸레 수준이었다. 추억이 떠올라 며칠 고민했다. 안 버리고 안 쓰고 사느니 그림으로 더 오래 남기자는 생각으로 버렸다. 이제 생각해보니 가장 머뭇거렸던 물건이 가장 속시원했다.
버리고 못내 아쉬워 다시 찾아온 물건도 있나.
일단 그림을 그린 뒤에는 아쉬워도 버렸다. 하지만 그리다가 버릴 물건을 수정한 날은 있다. 어떤 건 그리고 있는데 남편이 절대 안 된다며 막아 그리던 페이지를 뜯어낸 적도 있다.
하루 한 가지, 작은 물건들을 버리면서 달라진 점은.
정말 많은데, 그중에서 가장 크게 바뀐 것은 물건의 끝을 생각하게 된다는 거다. 무언가를 살 때 이게 버려질 물건인지 아닌지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1년 동안 꾸준히 버려보면 내게 정말 필요한 물건이 뭔지, 안 쓰는 물건이 뭔지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소비도 달라진다. 어차피 버려질 물건이라면 좀더 싸고 실용적인 걸 구입하고, 끝까지 함께할 물건이라면 좋은 것을 샀다.
아직도 버릴 것이 한 트럭은 남았다고 썼는데, 또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책을 다 쓴 뒤에도 버리기를 계속했다. 아무리 줄여도 준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 혼자만의 살림이 아니라서 나만 안 사고 버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남편과 딸의 물건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미국에 오기 전 가족과 합의한 게 각자 물건을 하나 살 때 원래 자신이 가진 물건을 두 개 버리기로 했다. 그러니 소비가 줄었다.
물건을 버리면서 스르륵 가라앉는 감정이 마법 같다고 했는데.
처음 몇 달 동안 물건들을 버리면서 만족스러운 기분은 아니었다. 버리면서 이래도 되나 싶었다. 멀쩡해 보이는 물건을 버려 죄짓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버리기로 마음먹고 행동하니 감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물건을 버리면서 후회와 체념하는 느낌을 반복하며 연습이 되었달까. 그런 식으로 나름 기술자가 되고 있었다. 물건도 감정도 버리는 일이 처음에는 어렵지 조금씩 나아지더라.
망설이다 끝내 버리지 못한 물건들의 행방은.
아직 잘 간직하고 있다. 살아남은 것들이기 때문에 더 정이 간다. 플라스틱 목걸이와 반지는 여기까지 가져왔다. 나는 여전히 잘 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버리면서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알았다. 구분해나가면서 저절로 알게 되더라.
시인 황인숙 선생이 주신 물건을 많이 버렸던데 섭섭해하진 않았나.
전혀 섭섭해하지 않으셨다. 내가 버린 물건들로 고양이를 위한 기금 마련 벼룩시장도 열 수 있다고 좋아하셨다. 계속 버리라며. 그리고 꿋꿋하게 계속 주셨다. 미국으로 떠나오기 바로 전날까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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