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이던가, 아니면 그보다 더 전이던가. 뻗치는 울기를 다잡지 못해 매칼없이 아무 버스에나 올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을 떠돌던 며칠이 있었다. 그중 어느 한 날 초저녁 가로등 불 밝힐 무렵 강원도 영월에 닿았다. 버스표에는 태백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태백보다는 영월이라는 이름이 좋아 버스에서 내려 발 닿는 대로 걸었다. 서늘했다. 마을길 옆 우뚝 솟은 은행나무에서 쏟아진 잎이 노오란 주단을 깔아놓던 계절이었으므로 늦가을 무렵이었던가보다.
검은 강 모닥불 앞 깔깔대던 고딩들
은행나무길을 지나 얼마간 걸어가자 검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을 건너는 큰 다리에 밝힌 가로등이 훤했으나 강은 그 불빛에 굴하지 않고 검게 흘렀다. 그 검은 강 옆 자갈밭 버드나무 아래 반짝 일렁이는 불빛이 보였다. 모닥불이었다. 사람 소리도 들렸다. 젊은 남녀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강물 위에 낮게 깔려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얌마” “뭐 인마” 어쩌고 하며 남자들이 허풍을 떨면 “미친년아” “시발년아” 어쩌고 하며 여자들이 깔깔거렸다.
그 불 옆에서 깔깔거리며 웃고 떠드는 젊은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져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보았더니 교복을 입은 남녀 대여섯이 불 옆에 모여 놀고 있었다.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운동장이 아니라, PC방이 아니라, 읍내 번화한 거리의 커피숍이나 음식점이 아니라 검은 강물 옆으로 넓게 펼쳐진 자갈밭에 모닥불을 피우고 저이들 좋을 대로 웃고 떠들며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리라면 담배도 한 모금 피워볼 테고 소주도 한 모금 마셔볼 일일 테지. 그 불에 소시지라도 구워 안주 삼을 것이고 고구마라도 구워 맘에 담았던 가시나 손에 들려주는 것이 예삿일일 테다.
그 자갈밭 넘어 강둑에 서면 훤하게 불 밝힌 영월 읍내가 있어도 검게 흐르는 강과 모닥불만 할까. 나무라는 이 없고 큰일 날 것도 없다. 헬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하던 시절이었으나 영월의 까진 고딩들은 헬조선과는 무관해 보였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이들을 보았다면 영월의 ‘밝은 미래’라고 말했을까.
내 글을 읽은 독자들 중 내 나이를 알고 놀라는 사람이 많다. 글만 보면 40∼50대 중년이거나 초로에 접어든 사람으로 여겼는데 알고 봤더니 새파랗게 어린놈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의 중년들이 유년기를 보냈던 시대의 끝자락이 연장된 벽촌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모두가 어느 경계를 살아간다고 한다면, 나는 내 또래들과는 달리 그 경계를 뒤늦게 건널 수 있었다.
내가 머물렀던 그 경계에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방임이라는 비옥한 토양과 강물이 있었다. 부모는 아이를 돌볼 수 없이 바쁘게 살기도 했을 테지만 돌보지 않아도 걱정할 것 없는 환경이 있었다. 물리면 안 되는 뱀이나 먹으면 죽는 독초에 대해서만 주의를 주고 밖으로 내보냈다. 아침에 집을 나서 산과 강, 들과 바다, 저수지를 쏘다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와도 나무라지 않았다.
큰일 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방임은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확실한 교육법이었다. 저이들끼리 뭉쳐다니며 말짓을 했는데 돌이켜보면 그 모든 놀이가 배움이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 보고 배운 것도 많지만 더 크게 얻은 것은 자존감이 아니었을까. 누군가 옳고 그름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홀로 혹은 또래들과 어울리고 부대끼며 알아낸 것, 만든 것, 찾아낸 것, 맛본 것, 밝혀낸 것, 잡은 것,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이 옳고 그름을 결정짓게 했다. 그럼으로써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나’라는 존재가 된 것이 아닐까.
치장된 거친 것, 늙은 청춘들의 자조
어젯밤 늦게까지 거리를 싸돌아다녔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각, 도시의 어두운 광장 한편에 중학생 즈음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모여 놀고 있었다. 시장했는지 컵라면을 손에 들고 후루룩거리는 아이들도 있고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웅성거리는 무리도 있었다. 그 아이들도 당대의 경계를 건너고 있을 참인데 그들의 어두운 광장은 영월의 검은 강과 크게 대비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새벽에 먹는 컵라면의 맛과 냄새, 시대의 멜로디가 그들을 하나의 다른 존재로 키워내리라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도 나름대로 헬조선을 부대끼며 알아내고, 노래하고, 춤추고, 웃고, 까불며 그 새벽을 스스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부터 ‘와일드푸드’라는 말이 유행이다. 그 뒤에 ‘축제’라는 말을 붙여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축제장에 가보면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많다. 배열된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감자, 고구마, 옥수수, 생선, 닭고기 따위를 구워 먹는 놀이를 한다. 그 닫힌 공간과 북적이는 인파, 통제와 지정은 기획하에 이루어진 성공적인 마케팅이자 와일드푸드라는 이름으로 치장된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 축제장에선 그 어떤 ‘거친 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온 시절을 회상하는 늙어버린 청춘들이 그들의 아이들에게 꾸며진 ‘와일드’를 먹이며 자조하는 듯 보인다. 꾸며지고 통제된 와일드라니.
헬조선에서 진정한 와일드푸드란 저이들끼리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 컵라면, 햄버거, 닭꼬치, 어묵일지 모른다. 담배와 소주일지 모른다. 생각해보라. 나는 땅과 바다에서 먹을 것을 찾아 먹으며 자랐다면 도시의 아이들은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찾아 먹으며 자란다. 자라는 환경은 아이들이 애써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 환경에 아이들을 던져놓은 것이다.
나는 바란다. 그 어두운 광장에서 저이들끼리 먹고 마시고 피우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며 진정 자유로운 거친 녀석들로 자라기를. 나는 또한 바란다. 그 어두운 동강에서 저이들끼리 먹고 마시고 피우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며 진정 자유로운 거친 녀석들로 자라기를. 도시의 어두운 광장과 영월의 어두운 동강에서 키운 자존감이 그 어둠보다 밝기를. 그렇게 자라서, 꾸며진 거침과 부드러움으로 완성된 헬조선을 박살 내버리기를.
거칠고 자유롭게 헬조선을 박살 내길나를 포함한 기성세대가 말하는 옳고 그름을 모두 부정하고 그대들 스스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에서 옮고 그름을 판단하기를. 포기라 읊조리기보다 거부한다고 소리치기를. 헬조선에서 포기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포기라는 단어는 그대들의 자유분방함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포기가 아니라 거부한다 말하길. 헬조선을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어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거부한다고 크게 소리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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