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열여섯 살 때… 그러니까 중학교 졸업반일 때 엄청난 고민이 하나 있었어요. 집 옆에 있는 공장에 취직하느냐,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3년을 더 공부하느냐. 굉장히 중요한 선택이었어요. 여공으로 사느냐 엘리트로 사느냐 결정짓는 거였으니까요. 그러다 고민 끝에 엘리트로 살기로 결정했어요.”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을까, 수남(이정현)의 삶은. 고등학교 진학 뒤 최연소 최다 자격증 보유자로 이름을 날렸으나 그는 능력을 한번 펼쳐보지도 못하고 사회에 나가 쓴맛만 봤다. 영화 는 달콤한 인생을 살고 싶어 고군분투하지만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한없이 나아가는 이상한 나라에 사는 수남의 이야기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행복을 향해 달려갈수록 좌절이 밀려오고</font></font>그런데 이 영화의 장르를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이상한 세계에서 온갖 곤경을 겪으며 출구를 찾아나가니까 모험? 잔혹한 살인, 세탁소 뒤편 피로 물든 어두컴컴한 작업실… 호러? 때때로 등장하는 만화 같은 폭소의 순간… 코미디? 그리고 남편을 지극히, 아주 끔찍하게 사랑하는 수남… 영화를 찍은 안국진 감독은 어느 부분에선 이 영화를 아주 현실적인 로맨스 영화로 봐도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로맨스?
우리가 속한 이 세계처럼 온갖 장르를 버무린 영화 는 8월13일 스크린에 걸린 이후 개봉 3일차에 1만 관객, 6일차에 2만 관객을 모았다. 개봉관 수가 적고 오전이나 심야시간대 등 비교적 불리한 시간에 배치된 점에 비추면 꽤 성적이 좋은 편이다. 8월1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안국진 감독을 만났다. 는 그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 수남을 움직이게 하는 말이다. 고등학교 졸업 뒤 별 볼일 없어진 주산·부기 따위의 자격증을 가지고 일자리를 찾던 수남은 결국 별 볼일 없는 회사에 취직해 그저그런 일상을 이어나간다. 하루하루 행복이란 단어가 희미해져가는 가운데 수남은 연애를 시작하고 오랜만에 핑크빛 미래를 그린다.
그런데 두 사람은 너무 달랐다. 수남은 달달한 이 순간을 조금 더 오래 붙들고 싶고, 그의 연인은 현실을 담보로 미래의 행복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수남은 눈앞에 보이는 행복을 붙들기 위해 오늘 그렇게 애를 쓰고, 남자친구는 보이지 않는(가령 아직 낳지도 않은 자식 걱정) 행복을 더듬으며 악다구니 같은 일상을 참아낸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는 출산도, 신혼여행도 당분간 보류다. 삶의 지향점이 같고도 다른 두 사람은 각자의 모서리를 조금씩 둥글려가며 어긋난 부분을 맞춰 살아가기로 한다.
하지만 행복을 향해 달려나갈수록 좌절은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일하던 남편의 손가락이 절단기에 잘려나간다.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게 된 남편은 세상으로부터 점점 자신을 고립시킨다. 좌절한 남편에게 행복을 되찾아주기 위해서는 집을 사야 한다. 수남은 일을 늘린다. 신문 배달을 하고, 빌딩 계단을 닦고, 식당에서 도마를 두드리고, 틈이 날 때는 남의 집 청소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성실하게 일을 해도, 처음부터 가난했던 수남은 가난하고 가난하고 또 가난하다. 빠르게 뛰는 집값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수남은 큰 빚을 지고 집을 얻는다. 그토록 원하던 집을 얻었으니 두 사람은 다시 행복하게 살았을까. 남편은 끝내 웅크린 몸을 일으켜 동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자살 시도를 했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어쩌면 로맨스 영화?</font></font>모든 면에서 수남 혼자 고군분투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처음부터 지향점이 너무 다른데 결혼을 했고, 남편의 자살 시도 이후로는 완전히 일방적인 사랑, 너무 열심인 사랑이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남이 남편을 사랑하는 방식은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사랑하는 방식이 삶과 연결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관객이 보면서 로맨스 영화로 해석할 여지가 있으면 좋겠다, 라는 것도 있었다. 일반 영화에서는 판타지 같은 사랑, 우리가 보면서 나도 저런 사랑을 하고 싶어, 하는 식으로 사랑을 다룬다. 그것과는 다르게 삶에 밀접한 관계로서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 집착적이고 결국에는 자기만족인, 자기 생활을 위한, 심리적으로 기대고 싶은. 어떻게 보면 되게 이기적인 거다. 그런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남편을 청각장애인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수남과 반대되면 좋겠다, 모든 면에서. 수남보다 더 근본적으로 솔직하게 노동에 집착하는 사람, 땀 흘리는 것에 보람을 찾는 사람, 노동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그리고 싶었다). 수남이 자기 욕심을 채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노동 자체, 미래에 대한 투자, 자식과 집에 대한 집착이 있는 사람이다. 청력이 점점 나빠지면서 세상과 단절되고, 손을 다치면서 자기 노동성도 잃어버리는 남자다. 누구 하나 잘못한 것도 아닌데 불가피하게, 이유도 알 수 없이, 분명 사회적으로 그걸 막아줄 수 있었을 텐데 운이 나빴다는 이유만으로도 고립돼버릴 수 있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그토록 집에 집착한 이유는 뭘까.한국 사회를 얘기하면서 집을 빼놓기가 힘들기도 했고,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게 좀 위험한 말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요즘 정치적인 발언이…(여기서 안 감독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진다). 사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동하는 수남의 캐릭터는 TV 프로그램 에서 착안했다)보다 먼저 영화에 영향을 준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용산 참사를 보면서 분명한 피해자가 있으니 이득을 보는 주체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득을 보는 자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사람들은 그걸 궁금해하지도 않더라. 자기랑 비슷한 계급의 사람을 매도하고 욕하는 수평 폭력 현상이 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싸움의 대상이 잘못되었다</font></font>수남의 발바닥에 누가 씹다버린 껌처럼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는 삶의 비극은 그가 행복하려고 발버둥칠수록 집요하게 파고든다. 집 얻는 데 생긴 빚 1억4천만원에 이제는 남편 병원비까지 들어간다. 수남은 자신의 집을 가난한 신혼부부에게 내주고 고시원에 들어가 살면서 본디대로 성실하게 일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으니 드디어 볕 들 날이 온 걸까. 산 중턱 낡고 허름한 수남의 동네에 재개발 바람이 일렁인다. 어쩌면 수남의 인생에도 모래가 황금으로 변하는 연금술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가난한 아기 엄마에게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하는 가난한 수남이라든지, 재개발 문제에 부딪혀서도 같은 계급의 사람들끼리 치고받고 싸운다. 결국 우리끼리 싸우다가 다 죽을 듯한 허탈감 같은 게 있다.누구는 수남이 왜 약자냐, 집 갖고 있는데 살 만한 사람 아니냐는 질문도 하더라. 수남은 자기 욕심을 위해 한쪽만 보고 맹목적으로 가는 사람이다. 집만 있으면 행복하다? 크게 놓고 봤을 때 대단한 착각이 아닌가. 대중이 매스컴에 휘둘리며 같은 계급끼리 서로 싸우고 있는 이 세태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그러면서 우리 세대 이야기도 계속 하고 싶었다. 과정만 있고 결과가 없는, 계속 노력만 하다가 끝날 것 같은 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싸움. 싸움의 대상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1980년생이다. 같은 세대의 고민이 많이 녹아 있다. 에서도 청년 빈곤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투잡 스리잡을 갖고도 계속 가난한 수남의 삶과 청년 빈곤이 겹쳐 보인다.지금 이 영화를 찍어서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그러는 거지만, (웃음) 딱 1년 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백수였고 시나리오만 쓰고 미래가 엄청 불안하고 영화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스스로 속 편하게 산다, 비생산적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
뉴스에 나오는 성공신화 같은 것은 주위에서, 특히 우리 세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다. 나는 다행히, 감독이 되고 싶어서 애를 쓰다가 아카데미라는 데가 있어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좋은 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출연한 것에 대해서는) 영화 하는 선배들이 에 나올 법한 일이라고 할 정도로 운이 좋았다. 영화 하는 친구들끼리 만나면 그런 얘기 많이 한다. 우리 노력하는데, 안 하는 것도 아닌데…. 내 탓만 하고 살기에는 억울한 감정을 느꼈다. 시스템의 문제, 평소 노동이나 계급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좀 지치기도 한다. 계속 변화가 없으니 오히려 내가 이상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불행해지니 이제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하는 상태까지 온 것 같기도 하다. 용산 참사 때 그런 큰일을 겪었는데, 세월호 때 완전히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난 사실 설마 이 일도 똑같이 가겠나 싶었는데, 정치적 비화로 가고 결국 또 약자들끼리 싸우고…. 너무 배신감이 들고 허탈하고 지쳤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젊은 사람은 소리 지르고, 중년은 울고</font></font>어쩌면 우리도 희망과 행복을 찾아 모험을 떠났지만 미로에 빠져 헤매는 앨리스들일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 기대고 싶은 소중한 것, 끝까지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생겼다. 그런데 이 또한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면 우리는 주체 못할 불안과 상실을 해소하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는 그런 이야기다.
안 감독은 수남이 재개발 문제로 동네 주민 형석과 싸우다 커다란 세탁기에 갇혀 한참을 돌다 겨우 살아나는 장면에서 어떤 사람은 소리 지르고 어떤 사람은 운다고 말했다. “젊은 사람들은 잔인하다고 소리 지르는데 중·장년층, 특히 여성분들은 이 부분에서 많이 운다. 저렇게까지 해야 해? 수남이 불쌍하다면서.”
아무리 애써도 다 젖은 빨래처럼 고단한, 세탁기가 탈탈 쥐어짜도 생면부지의 목숨을 이어나가는 수남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은유한다. 그리고 이 난국을, 성실하고 잔혹하게, 때때로 충동적인 방식으로 타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수남은 과연 이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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