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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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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집이게 하는 밥 냄새

이번 휴가에 한 일은 집에서 밥해먹기, 가장 소중한 휴식처인 ‘집’을 복원하는 일
등록 2015-08-14 15:31 수정 2020-05-03 04:28

장사를 시작하고 몇 개월이 지나 사람 없는 집 안에 발을 들인 그녀는 어쩐지 우리 집이 아니라 낯선 집에 잘못 들어선 느낌이 들었노라고 말했다. 책장·걸상·침대·서랍장·세탁기·냉장고를 비롯해 집 안의 물건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공간을 채우던 냄새가 사라지자 낯설게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그 사라진 냄새는 밥 냄새였다.

식당일을 하면서 오히려 집에서 밥을 안 해먹게 되었다. 여름휴가는 집에서 밥을 지어 먹는 게 일정의 전부였다. 전호용

식당일을 하면서 오히려 집에서 밥을 안 해먹게 되었다. 여름휴가는 집에서 밥을 지어 먹는 게 일정의 전부였다. 전호용

“음식을 안 해먹으면 사람 냄새가 사라져요”

서울에서 품을 팔아 밥을 버는 그녀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한 달에 고작 하루이틀뿐이다. 먼 걸음을 한 귀한 사람에게 밥이라도 내 손으로 지어 먹여야겠다 마음먹고 그녀가 오기 전날 장을 보고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이고 밥을 지은 지 3년이 지났다. 비린 밥 냄새가 온 집 안에 배어들고 생선 굽는 기름 냄새, 새콤하게 익어가는 물김치 냄새와 곰삭은 젓갈 냄새, 추운 날 몸을 녹여줬던 뜨끈한 된장국물 냄새가 ‘우리 집’ 냄새가 되었고 또한 그녀가 기억하는 나의 냄새가 되었다. 찬 바람을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밥의 온기와 냄새로 추위를 떨치고 서울의 때를 벗겨냈다.

나는 이미 몇 개월 전부터 그 낯섦을 느끼고 있었다. 새벽에 눈떠 문을 열고 식당에 나가면 밤늦은 시간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가스레인지 한 번 켤 일이 없고 냉장고 문 한 번 열어볼 기운이 없다. 겨우 샤워를 하고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면 그대로 침대에 고꾸라져 잠이 들고 새벽이면 일어나 집을 나선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집 안에 남은 냄새란 싸구려 샴푸 냄새와 섬유유연제 냄새뿐이다. 이 세제들의 향긋한 냄새가 얼마나 가볍고 천박하고 낯선 것인지를 밥 냄새가 사라진 집 안에 들어설 때마다 느낀다. 밥을 팔아 밥을 버는 사람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람의 집에선 밥 짓는 냄새가 사라져버렸다.

나만이 편할 수 있는 냄새

“음식을 해먹지 않으면 집에서 사람 냄새가 거짓말처럼 가시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 그것이 사람 냄새일 것이다. 고급스러운 향수, 향초, 방향제, 탈취제, 섬유유연제, 로션, 스킨, 샴푸, 비누 따위가 그 냄새를 대신할 수 없다. 헤어지고 하루이틀은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며칠이 더 지나면 모습은 희미하게 사라지고 촉감이 남는다. 살결, 머릿결이 손과 얼굴에 닿았던 느낌마저 사라질 즈음이면 어디에서 불어오는 것인지 모를 그녀의 땀 냄새와 오장육부에서 밀고 올라온 그녀만의 사람 냄새가 코끝에서 일렁거린다. 손수 지은 밥을 기분 좋게 나눠 먹고 배가 든든해지면 그 사람만의 좋은 냄새가 몸에서 배어나온다. 사람들은 그 냄새를 부끄럽게 여기거나 감추고 싶어 향수를 뿌리고 이를 닦지만 그 냄새가 없다면 당신은 유령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한 달이 넘도록 만나지 못할 때면 그녀만의 냄새가 더욱 짙어지는데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냄새는 더욱더 깊이 뇌리에 사무쳐 명료해진다. 전주로 향하는 그녀의 들숨에서도 오래전부터 ‘그 사람’의 냄새가 일렁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선 집에서 익숙했던 냄새가 사라졌으니 얼마나 낯설고 서운했을까.

내 아비는 한 달도 넘게 중환자실에서 무의식 상태로 연명하다 집에 돌아와 숨을 거뒀다. 그 한 달간 목구멍으로 넘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임종 순간 배내똥이 나왔다. 마지막 날숨에서 느껴졌던 지독한 악취가 배내똥에서도 똑같이 느껴졌다. 나는 물수건으로 배내똥을 닦아내고 다시 깨끗한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냈다. 그럼에도 죽은 사람의 냄새는 가시질 않았고 내 손과 몸에 깊이 배어들었다. 방바닥에도, 이불에도, 장롱에도, 천장에도 그 냄새가 배어들어 사람의 죽음을 전했다. 그렇게 장사를 치르고 사흘 뒤 아비가 숨을 거둔 자리에 이불을 펴고 누워 잠을 잤다. 그곳은 평소 내가 누워 잠을 자던 자리였으므로 그렇게 했다. 집 안에는 여전히 지독한 죽음의 냄새가 남아 있었지만 방향제나 탈취제를 뿌려 그 냄새를 가리려는 생각을 어미나 나는 하지 못했다. 사람은 죽어 사라지고 죽음의 냄새만 남아 있지만 그 방은, 그 집은 생로병사가 끊이지 않았던 ‘집’이었으므로 죽음의 냄새 또한 들숨으로 호흡되는 삶의 이유가 된다. 그것은 할머니의 죽음으로도 증명된 것인데, 할머니 또한 아비가 숨을 거뒀던 같은 자리에서 임종을 맞았고, 그 뒤로 오랫동안 그 자리에 상을 펴고 밥을 먹고 잠을 잤으므로 삶은 여전히 죽음의 냄새를 호흡하며 이어져왔다. 그러므로 아비가 남긴 죽음의 냄새는 다시 살아가는 사람들의 냄새 안으로 스며들 것이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지었고 밥상을 들여 어미를 먹였다. 그렇게 밥 비린내와 박대 구운 기름내, 풋고추 볶은 간장 냄새가 한끼 한끼마다 켜켜이 쌓여 오늘에 이르렀다. 냄새가, 묵은 냄새가 그뿐이겠는가. 어려서부터 깔고 덮었던 요와 이불의 커버를 벗겨내보면 내가 지린 오줌 자리가 여전히 누렇게 남아 있고, 낡은 서랍장에는 언제 입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낡은 옷가지가 그 시절의 냄새를 품고 잠들어 있다. 그 냄새들이 하나로 합쳐져 공간을 채운다. 그 안에서 묵은 땀내 나는 베개를 베고 누우면 그 어느 편안한 잠자리에서보다 더 깊고 편안한 잠에 빠져들게 된다. 누구에게도 권유할 수 없는, 하물며 내 형제나 그녀에게도 권유할 수 없는, 나만이 편안할 수 있는 냄새가 배어 있다. 그 편안한 냄새 안에는 아비의 죽음을 알렸던, 그 어떤 냄새보다 지독했던 배내똥 냄새도 섞여 있는 것이다.

길고양이도 밥 냄새에 길들고
아침에 지은 밥 냄새에 일어난 길고양이 새끼들이 밥을 받아먹고 있다. 전호용

아침에 지은 밥 냄새에 일어난 길고양이 새끼들이 밥을 받아먹고 있다. 전호용

그녀는 내가 출근하고 혼자 남은 시간 동안 밥을 지어놓고 서울로 돌아갔다.

“밥을 챙겨 먹을 시간은 없을 테지만 집에 들어왔을 때 밥 냄새가 나면 집에 왔다는 느낌이 들 것 같아 밥 지어놓고 가요. 앞으로도 종종 밥을 지어놓을게요. 입맛 없어도 한술씩 뜨고 가요.”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집 안에 또다시 싸구려 세제와 섬유유연제 냄새와 눅지근한 습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나온 시멘트 냄새가 뒤섞여 가득 찰 무렵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어쩌면 부모·형제보다 더 살가운 이 사람의 집에 들락거린 지 어림 20년이 다 되어간다. 좀처럼 살림살이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헐거운 집이지만 언제든 찾아가 밥과 잠자리를 청하면 넉넉하게 먹이고 따뜻하게 재워줬다. 그렇게 그의 집에서 밥 먹고 잠잔 시간이 평생의 1할은 될 터이니 어미가 내주는 밥과 이부자리만 못할 게 없다. 새벽 늦은 시간까지 이야길 나누고 잠들어 아침이 되었을 때 밥 냄새에 얼핏 잠에서 깨어났다. 주방에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지금 막 밥솥 뚜껑을 열기라도 했는지 밥 비린내가 닫힌 문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으니 작은딸년 학교 보내려고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모양이었다. 그 냄새가 어찌나 편안하고 좋던지 그대로 깊이 잠들어 1시간 뒤에 다시 눈이 떠졌다. 이번엔 달걀프라이를 하는 기름 냄새가 코끝에 와닿았다. 늦둥이 막내아들놈 학교 보내려고 밥을 차리는 모양이었다. 새벽 늦게까지 서로의 고단한 삶을 푸념하듯 내뱉었지만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밥을 지어 새끼들 먹이고 학교 보내는 그 냄새가 지난밤을 뒤덮었던 나의 걱정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산이야, 일어나서 밥 먹고 학교 가자.”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거실로 나가봤더니 아이는 여전히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뒤척거리고 있었고 친구는 다시 한번 낮은 목소리로 아이의 잠을 깨웠다. 몇 시간밖에 눈 붙이지 못하고 일어난 친구의 얼굴은 고단해 보였지만 어린것의 옹알이에 이내 환하게 피어났다. 현관문을 열고 마당에 나가봤더니 새끼고양이 두 마리가 문 앞에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어느 창고 구석진 자리에서 주워온 길고양이 새끼라는데 밥을 먹였더니 떠나지 않고 집고양이가 되었다고 했다. 그 고양이들도 밥 짓는 냄새에 잠을 깨 문 앞에서 친구의 밥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길고양이도 밥 냄새에 길들여져 집고양이가 되는구나.’

친구에게 이러한 삶이 고단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고단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러한 삶이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또한 행복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밥을 차리는 그의 얼굴엔 이 두 가지 대답이 모두 담겨 있고 나 또한 그 대답을 짐작할 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집이 품었던 냄새를 회복시키기 위해

며칠간 허기가 일 때마다 친구가 차리던 아침밥 냄새와 그녀의 날숨 냄새가 코끝에서 진동을 했다. 하루 종일 튀기고 볶고 굽느라 기름 냄새가 온 가게를 뒤덮어도 그녀가 오기로 한 날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기름 냄새는 느껴지지 않고 비릿한 밥 냄새만 코끝에 와닿았다. 그 이유는 아마 두 달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여름휴가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번 여름휴가 동안 집에서 밥을 지어 먹으며 보내기로 결정하고 그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무더운 여름날 사람들 틈에서 고생하지 말자는 뜻이기도 했지만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휴식처인 ‘집’을 복원하자는 의미이기도 했다. 두 사람에게 공히 가장 행복했던 공간을 꼽으라면 섬진강도, 지리산도, 동해 바다도, 설악산도, 강화도도 아닌 ‘집’임이 분명한데 여느 모텔이나 다름없는 공간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여름휴가는 집이 품었던 냄새를 회복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우선 그녀는 깻잎장아찌와 족발을 준비해왔다. 나는 빵을 굽고 불고기와 닭고기를 준비했다. 로컬푸드에 들러 동부콩과 두부, 가지, 토마토를 비롯한 몇 가지 식재료를 구입하고 가까운 빵집에 들러 후식으로 먹을 만주(콩과 팥으로 속을 채운 빵) 몇 알을 사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나흘 동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집 밖에 나가지 않고 밥을 지어 먹고 잠자고 뒹굴거렸다.

첫날은 가게에서 팔고 남은 음식과 그녀가 싸온 족발 냄새로 집 안을 뒤덮었다. 다음날 아침엔 동부를 넣어 밥을 지었다. 비릿하면서 고소한 콩 냄새가 집 안에 가득 배어들었다. 김치콩나물국을 끓이고, 불고기를 볶아 상에 올렸다. 그녀가 준비한 깻잎장아찌 냄새가 입과 집 안에서 향기롭게 맴돌았다. 닭고기를 넣은 카레의 향이 온 동네로 퍼져나갈 만큼 강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만 지어 먹고 어슬렁거리고 방바닥과 침대를 오가며 뒹굴거리고 잠을 잤다. 잠에서 깨면 또 무언가를 먹거나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집은 사람이 사는 집으로 복원되었다. 여기에 계속해서 다양한 음식 냄새를 덧칠하고 서로의 날숨을 불어넣고 삶의 찌꺼기들이 말라붙으면 삶의 고단함을 잠재우는 집이 될 것이다.

머퉁이를 주는 말 ‘오빠 냄새’

그리고 언젠가, 멀지 않은 시간 안에,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떠나 두 사람이 평생을 살다 죽어도 좋을 집으로 이사 갈 수 있길 바란다.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나던 날부터 그녀의 죽음을 떠올렸었다. ‘이 사람은 내 품에서 숨을 거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녀가 임종을 맞을 공간이 두 사람의 희로애락과 체취가 짙게 밴, 두 사람만이 편안할 수 있는 ‘집’이기를 바란다. 나는 내 아비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의 배내똥을 닦아내고, 깨끗이 몸을 닦고, 그 자리에서 다시 잠을 자다 그녀가 남긴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생을 마감하고 싶다.

방향제, 탈취제, 세정용품, 화장품 등의 TV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자신이 품은 냄새가 그리도 부끄럽고, 사랑하는 사람의 체취가 그리도 불쾌할까.

“어흐, 오빠 냄새~”라며 머퉁이를 주는 TV 광고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야 이년아, 나중에 그 오빠 냄새가 뼈에 사무치게 그리울 날이 올 것이다.’

전호용 식당 주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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