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거룩한 순례자가 되기로 했다. 맥주 불모지라 불리던 한국에서 최근 개성 있는 맥주들이 넘실댄다. 맛 좋기로 이름난 수입맥주들이 속속 소개되고 국내 소규모 양조장에서 제조되는 개성 있는 맥주들을 펍에서 쉽게 맛볼 수 있게 됐다. 맥주가 만든 물길을 따라나섰다. 8월5일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한 가게 앞에 선 입간판을 보고 메뉴를 읽었다. 스페인 전통 맥주 에스뜨레야 담, 수제 맥주 세르도스 볼라도레스…. 난생처음 들어보는 복잡한 이름에 왠지 피곤해졌다. 하지만 맥주를 받아 한 모금, 코끝을 치는 꽃과 꿀 향기가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다음으로 대치동의 한 수제 맥주 펍을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맥주 팟캐스트 () 진행자 홍지혜(33)씨의 추천으로 유자 향이 나는 맥주(유주얼리에일)와 수박맛 맥주(워터멜론위트에일), 홉 향이 강한 인디안페일에일을 연거푸 마셨다. 유주얼리에일은 방문한 펍에서 레시피를 개발해 제조한 것으로 그곳에서만 마실 수 있다. 이렇게 펍 특유의 맛과 분위기에 따라 옮겨다니며 맥주 맛을 보는 것을 ‘펍 크롤’(Pub Crawl)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맥주 마니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맥주가 소개될 때마다 펍을 찾아다니며 유행하기 시작했다.
펍 크롤 가이드북인 을 쓴 이기중 전남대 교수는 커피와 와인 열풍 다음으로 맥주의 전성기가 시작됐다고 평가한다. 맥주를 사랑하는 이른바 ‘맥주 덕후’들에게 더없이 좋은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해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소규모 양조장에서 맥주를 제조해 유통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해외에서 다양한 맥주 맛을 보고 돌아온 이들이 늘면서 국내에 소개되는 수입맥주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관세청이 5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1~4월 맥주 수입량은 4만1881t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31.6%나 증가했다. 더불어 최근 1~2년 사이 가정용 맥주 제조 기계 판매 증가, 소규모 양조장의 크래프트 맥주 생산, 놀이공원에서처럼 이용권을 끊어 펍을 돌면서 맥주를 즐기는 맥주 축제 등을 포함해 지금 한국의 맥주 시장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평이다.
과의 전화 통화에서 “어제도 맥주 먹고 오늘도 맥주 먹으러 가는 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기중 교수는 마니아들 사이에 잘 알려진 펍 크롤러다. 대학 다닐 적부터 맥주를 좋아했던 그는 늘 새로운 맥주를 찾아다녔다. 국내에 맥주 라인업이 다양하지 않았던 20여 년 전 일본을 여행하면서 처음으로 밤마다 작은 꼬치구잇집을 찾아다니면서 생맥주를 마신 것이 첫 번째 펍 크롤이었다. 그리고 1990년대 미국 유학 중 벨기에 맥주를 만나면서 맥주에 완전히 빠져들게 되었다.
벨기에 맥주는 계보를 쓰기도 복잡할 정도로 종류가 풍성하다. 당시 미국에서 가본 벨기에 맥주 카페에만도 100가지가 넘는 벨기에 맥주 이름이 메뉴판에 쓰여 있었다고 한다. 2009년 50일 일정으로 떠난 맥주 여행의 기록을 모아 책 을 쓰기도 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전작을 쓸 때에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국내 맥주의 지형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3~4년 전부터 해외 마이크로 브루어리의 개성 강한 맥주들이 수입되더니 이태원을 중심으로 펍 자체에서 개발한 맥주(크래프트 맥주)를 판매하는 가게가 하나둘 등장했다.
크래프트 맥주란 대량 생산 및 유통되지 않고 자체 레시피로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들어지는 맥주를 말한다. 크래프트 맥주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미국의 양조자협회(BA·Brewers Association)는 크래프트 맥주의 개념을 △(자본)독립적 △소규모(유통) △전통적(개성 강한 레시피라도 500여 종 맥주 맛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부지런한 펍 크롤러는 일찍이 술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진행자 홍지혜씨의 경우가 그렇다. 온라인 커뮤니티 ‘맥주 만들기 동호회’(맥만동) 운영진이기도 한 그가 맥주를 마신 지는 이제 5년 남짓이 됐다. 평소 맥주를 즐기지 않던 그는 2010년 아일랜드 여행 중 우연히 들른 펍에서 맛본 맥주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색과 맛이 진한 스타우트 맥주 중 가장 잘 알려진 기네스를 그곳에서 처음 맛봤다. 그길로 맛있는 맥주를 찾아헤매는 펍 크롤러가 되었다. “학교 다닐 때 소주 말고 맥주 달라고 하면 선배들이 부르주아의 오줌이라며 놀리기도 했고, 그다지 맛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완전히 새로운 맛에 눈을 뜬 거죠.”
한국의 막걸리 도가, 지역 소주처럼 아일랜드 곳곳의 펍들은 그 가게 혹은 지역에서만 파는 맥주들이 있었는데, 맛을 비교해보고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아일랜드를 섭렵한 다음 여행 중 사귄 프랑스인 친구와 유럽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맥주도 매일 밤 마셨다. 이번엔 그 친구가 한국에 놀러왔다. 계속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마시다보니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이럴 것 같으면 만들어 먹자고 했다. 그렇게 자가 양조법을 찾아나섰고 지금 그의 냉장고엔 맥주 재료와 자가 제조한 맥주가 가득하다.
“밤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퐁퐁, 술 익는 소리가 너무 좋아요.” 홍씨가 활동 중인 맥만동에는 2만 명이 넘는 맥주 마니아들이 집결해 있다. 홍씨는 집에서 100ℓ(곰솥 5개 정도 된다) 발효조를 놓고 맥주를 만드는 여인, 키 낮은 냉장고를 개조해 테이블을 얹고 꼭지를 달아서 홈바를 만든 청년 등 만들고 마시기에 엄청난 열정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먹고 만들기 다음은 ‘가게 차리기’문을 열자 달큰한 냄새가 코끝에 들러붙었다. 8월5일 오전 11시 서울 충정로에 위치한 ‘수수보리 아카데미’에는 오전부터 술을 빚느라 부지런한 술꾼들이 모였다. 한국에 소개된 맥주를 거의 다 마시다시피 한 마니아부터 술을 마시는 것보다 만드는 과정이 신기하고 재밌어 찾아온 사람,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이들이 모였다.
집에서 맥주를 만드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만들기 쉬운 순서대로, 가공된 원액 캔을 물에 섞어 발효와 숙성을 거쳐 만드는 방법, 가공된 맥아 추출물을 물에 우려 홉을 넣고 만드는 부분 곡물 양조법, 보리의 싹을 틔운 맥아를 직접 사용해 만드는 완전 곡물 양조법이 있다.
홍지혜씨에 따르면 원액 캔으로 만든 맥주는 “고가의 수입맥주에 비할 수는 없지만 국내 시판 맥주보다 맛이 좋다”고 한다. 캔 2개와 발효조만 사면 20ℓ 정도 맥주를 만들 수 있다. 이날 강의를 한 민성준 강사(펍 히든트랙 양조자)는 부분 곡물 양조법은 완전 곡물 양조법에 비하면 “라면을 끓이는 수준으로 쉽지만 맛에 거의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양조장에서는 완전 곡물 양조법으로 맥주를 만든다. 맥아 추출물이 맥아보다 가격이 더 비싸기도 하고 다양한 맛을 낼 수 없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만드는 과정은 간단했다. 맥아(몰트)를 물에 넣고 우려낸 뒤 홉을 넣고 식혀서 효모를 넣고 발효하면 끝. 커다란 볼에 맥아 추출물을 옮겨담는데 달달하고 끈적한 냄새가 났다. 이곳 문을 처음 열었을 때 코를 사로잡던 냄새가 바로 발효되기 전 맥주의 달달한 향이었던 거다.
맥주 향에 취해 직접 술을 담가 마시다 가게를 차린 사람들도 있다. 국내 유명 크래프트 맥주 펍을 운영하는 이들 가운데 다수는 홈브루어(자가 양조자)나 펍 크롤러로 수년간 혼자 맥주를 즐기던 이들이다. 서울 신사동과 이태원에서 크래프트 맥주 펍 ‘퐁당’을 운영하는 이승용 대표는 “예전에는 한정된 맥주, 새로운 맥주가 나오면 마니아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적게는 3군데, 많게는 7군데 정도 펍을 돌면서 맥주를 마시곤 했다”고 말했다.
이태원의 펍 ‘사계’와 ‘파이루스’의 공동 운영자로 있는 이인호씨 또한 온라인 교육 관련 일을 하며 홈브루잉을 즐기다 더 많은 사람들과 맛있는 맥주를 나누기 위해 펍을 열었다. 홍지혜씨를 만난 대치동의 펍 ‘BOB’도 홈브루잉을 하던 사람들이 의기투합해서 열었다. 자체 개발 맥주, 특정 계절에만 마실 수 있는 맥주 등 맥주 마니아의 혀를 자극하는 맥주들이 넘실댄다.
“회전율 높은 노가리 가게 맥주도 신선”최근에는 오랜 마니아들도 다 맛보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맥주가 물밀듯이 들어온다. 그래서 맥주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넓어졌지만 복잡하고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다. 빽빽한 글씨로 맥주를 설명해놓은 메뉴판이나 아름다운 라벨을 뽐내며 냉장고에 진열된 수십 종의 수입맥주를 보면 오히려 주눅이 드는 기분이기도 하다. 신사동에서 ‘가로수브루잉컴퍼니’를 운영하는 조성용 대표는 펍을 찾아온 손님들이 맥주 리스트를 앞에 두고 “맥주를 잘 몰라서…”라며 어려워하는 경우도 종종 만난다고 한다. 이인호씨 또한 “갑자기 시장이 커지면서 오히려 불편한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 대표의 말마따나 “맥주는 맥주다”. 일상적으로 가장 싸고 쉽고 가볍게 접할 수 있는 술, 노동자의 피로를 풀어주는 대중적인 술이 맥주다. 이인호씨는 “크래프트 맥주가 아니라도 맛있는 맥주는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예컨대 생맥주가 정말 많이 팔리는 노가리 가게 같은 데서. 회전이 빠르면 신선한 맥주가 공급되고 맛도 좋다”고 추천했다. 펍의 개성을 드러내는 수제 맥주부터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포장마차에서 노가리를 뜯으며 마시는 얼음장 같은 한 잔까지. 어쨌거나 지금은 맥주 덕후들을 위한 시절, 우리의 밤은 잔을 넘쳐 흐르는 맥주만큼이나 풍성해질 것 같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지난 6월 중순, 경기도 평택에서 메르스 양성 환자가 늘어나고 있던 때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전국 비상 상황에서 출타한 이들의 일말의 불안은 ‘평택-음성’ 이정표 갈림길에서 조금 덜어졌다. ‘양성’ 평택 옆 ‘음성’. ‘부엉이’ 맥주로 알려진 히타치노 맥주를 생산하는 코리아크래프트브류어리는 충북 음성군 산업단지에 위치해 있다. 세 가지 방법으로 브루어리를 개방한다. ‘클래식 투어’와 ‘비어 긱 투어’ 두 가지 투어는 브루어리 마스터 마크 헤이먼과의 투어(비어 긱 투어)냐 아니냐의 차이다. 애플사 기술자로 일하다가 브루어리로 이직하고 한국의 음성군 브루어리까지 와 브루어리 건물에서 먹고 자는 마스터는, 심심할 때면 가끔 클래식 투어에도 ‘사람 구경’하러 온다고 한다. 그날의 오전 클래식 투어에는 왔다고 가이드는 전했다. 기자가 간 오후에는 안 왔단 말이다. 또 하나의 투어는 ‘유 드링크, 위 드라이브’, 서울에서 사람들을 싣고 와 고주망태를 태우고 돌아간다.
지붕널을 길게 늘여 그늘을 만들고 유리와 벽돌로 마감한 건물은 산업단지에서 단연 돋보인다. 샹들리에가 있는 홀에서 출발해 브루어리를 돈다. 맥즙이 만들어지는 따뜻한 방과 탱크에서 맥주가 익어가는 차가운 방으로 나누어져 있다. 재료가 발효되고 지나가는 관은 일본 ‘용접 장인’이 와서 한 달 동안 작업했다고 한다. 차가운 방에서는 발효 중인 맥주를 한잔 가득 따라준다. 히타치노 맥주를 생산하고 있지만 코리아크래프트브류어리는 제주감귤, 음성 생강 등 지역 특산물을 이용한 고유 브랜드 맥주도 생산하고 있다.
음성에 가면 읍내에 가서 다른 먹거리를 구경하고 먹는 것도 좋다. 브루어리를 세울 때 전국을 다 돌아다녔는데, 음성에 자리잡은 것은 물 때문이다. 특산물이 많지만 ‘미스터’를 뽑을 정도로 고추가 각별하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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