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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운전자 킨

등록 2015-06-26 17:04 수정 2020-05-03 04:28
정용일 기자

정용일 기자

킨은 새터민이다. 어떤 이는 탈북자라고도 부르고 북한이탈주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킨의 직업은 심야의 대리운전이다. 킨은 남으로 넘어와 이것저것 해보았지만 말투로 인해 번번이 적응에 실패했다. 대리운전은 최소한의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몇 년째 버틸 만하다. 손님과 말을 섞을 이유도 없고 목적지를 알려주면 그곳으로 운전을 해서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취한 손님들 중엔 킨에게 가끔 자신의 출신성분이나 첫사랑의 이름 따위를 궁금해하지 않아도 고백하는 이도 있다. 대리요금을 받으면 사납금을 입금하고 택시를 타고 돌아온다. 길을 잘 몰라도 남쪽은 내비게이션 하나만 있으면 겁먹을 필요가 없다. 감상에 젖어 자신의 과거를 밝히는 일이 킨에겐 없다. 남으로 넘어온 첫해엔 지인 목사의 소개로 휴대전화 판매대리점에서 일을 했다. 남으로 먼저 넘어온 선배들의 권유도 한몫했다. 남한말을 가장 빠르게 익힐 수 있고 자본주의를 가장 빠른 시간에 이해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했다. “동무! 게바라다니지 말구 기름진 사람들 잘 찾아붙으라. 남한에 붙어살이하려면 몫은 해야지. 처마물(낙숫물)에 강보리밥이라도 먹으려면 여기선 무엇이든 흐림수(속임수)를 잘 짜서 연습하라우.” 킨은 일을 시작하기 전 밤마다 처음 보는 휴대전화 종류의 기능과 사용법을 외우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다양한 요금제의 매뉴얼은 10년이 넘도록 받은 군대 훈련보다 가혹했다. 버벅대면서 그럭저럭 몇 개월 버티다가 킨은 스마트폰이 출시되자 탈진되어 사표를 냈다. 이런 탈진공화국에서 복잡한 요금제나 외우고 사느니 북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킨은 남으로 넘어오기 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킨은 남으로 오기 전 3년 동안 신발을 벗은 채 잠을 자본 적이 없다. 어디서건 언제든지 달아나야 할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킨은 북에선 꽃제비였다. 꽃제비는 먹을 것을 찾아헤매는 북한의 청소년과 아이들을 지칭하는 은어다. 제비가 따뜻한 곳을 찾아다니는 데 빗대어 만든 말이다. 김일성 사후 극심한 식량난과 함께 꽃제비들은 북한 내부에 확산됐다. 대부분 두만강 인근에서 구걸이나 소매치기로 하루를 연명했다. 킨도 북한의 고아수용소를 탈출해서 두만강 인근의 토굴에 모여살곤 했다. 극심한 가난과 허기에 시달리다가 킨은 소매치기를 익혔다. 꽃제비 두목의 혹독한 훈련 아래 낮에는 앵벌이(구걸)를 강요당하고 밤에는 소매치기를 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러다가 몇몇의 꽃제비들과 함께 중국 관광객의 주머니를 털었고 목숨을 걸고 중국으로 가는 기차에 몰래 올라탔다. 킨은 혼자 떨어지면 얼어죽거나 굶어죽게 되고 북한군에 잡히면 수용소로 돌아가거나 총살을 당한다는 생각에 항상 겁에 질려 있었다. 중국에서 라오스를 거쳐 남으로 오기까지 킨은 신발을 벗고 잠든 적이 없다.

킨은 숙소로 돌아와 동료들과 가끔 배달음식을 시켜놓고 옛 시절을 생각한다. “이 연방에서는 몇 년 동안 내 뇌파를 조사할 거다.” 자다가 고향에 두고 온 엄마와 여동생 생각이 날 때면 킨은 돌아누워 눈물을 흘린다. “눈물을 안 떨어뜨리려면 천장을 보라우.” “개소리는 보신탕집 가서 하라우! 나는 하나도 슬프지 않대두. 여기서 나는 앞꾼개미처럼 살아남는다.” “개자슥. 남한이 어디 급강하 훈련처럼 어금니만 꼭 깨물면 되는 곳인 줄 알아?” 포식자와 먹이 방식에 대해서 떠드는 사내들과 몇 번인가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변기통에 앉아서 소변을 보는 법도 익숙하다. 킨은 가끔 운전을 하면서 룸미러로 술에 취해 뒷좌석에서 곯아떨어진 손님을 보며 생각한다. ‘손기척이 들통나지 않게 동무의 지갑을 뽑아올릴 수도 있소. 하지만 나는 이제 이 위대한 탁아소를 사랑하오.’

김경주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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