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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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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왕국의 판

등록 2015-05-19 17:55 수정 2020-05-03 04:28
김태형 <한겨레> 기자

김태형 <한겨레> 기자

판은 중국집 배달원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집을 나와 중국집에 딸린 방 한 칸에서 먹고 잔다. 몇 년간 꾸준히 돈을 모아 동네에 치킨집 하나를 차릴 수 있는 자금이 마련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판은 화교인 사장님의 진지한 창업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제 이 나라는 중국집보단 치킨집이 대세가 아닐까? 치맥도 유행하고 요즘은 이것저것 해보다가 다 치킨집 배달로 넘어오는 시대니까.” “먹고살기 어려운 시대라는 거죠?” “너 수능 몇 등급이냐? ” “1학년 때는 1~3등급이었소.” “그럼 넌 치킨을 시켜먹고 사는 인생이 될 수 있었어. 지금은 몇 등급이야?” “7등급 정도 될 것 같아요.” “그럼 넌 치킨을 튀기는 인생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공부해.” “전 공부 안 해요. 배달하며 살 거예요.” “내 아들은 수능 10등급이야. 치킨을 배달하고 살아야 할 거야.” “그래도 사장님은 제게 중국집을 물려주실 생각은 없잖아요.” “당연하지. 넌 배달의 민족이 아니니까. 필리핀 피라며? 우리나라는 배달의 민족이야. 자부심이 있단다.” “저도 배달일을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요? 국민 대부분이 배달족으로 살아가잖아요.” “집으로 돌아가! 공부해.” “사장님도 화교지만 배달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셨다면서요?” “맞아. 이 나란 배달천국이야.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 사람들은 내 피를 알아보지 못해.” “꼭 치킨집 사장이 될 거예요. 배달의 민족이 되고 싶어요.” “장하다. 너처럼 내 아들도 꿈이 크면 좋을 텐데.”

판은 혼혈아다. 딸기농사를 하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15년 전에 필리핀에서 500만원으로 데려오셨다는 걸 할머니가 말해주었다. 판을 낳고 어머니는 1년 만에 아버지 돈을 몽땅 훔쳐 가출한 뒤 연락을 끊었다. 4살이 되자 아버지는 판에게 어머니가 코끼리를 보러 갔다고 하셨다. 6살이 되자 아버지는 판에게 어머니가 코끼리를 타고 먼 나라를 여행 중이라고 하셨다. 7살이 되자 아버지는 판에게 어머니는 코끼리가 먹어버린 것 같다고 하셨다. 판은 이제 더 이상 아버지의 딸기를 믿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아빠 딸기는 모두 가짜야. 달기만 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해 아버지는 쥐약을 술병에 타서 마셨다. 목숨은 살렸지만 쥐약으로 인해 두 눈이 멀었다. 쥐약을 먹은 쥐는 눈이 멀어 바깥으로 기어나온다. 싱크대에 부딪히다가 부지깽이나 벽돌에 맞아 죽는다고 했다.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죽어서 썩으면 안 되니까. 쥐약엔 눈이 머는 독이 들어 있다고 했다. 엄마도 돈에 눈이 멀었지만 그래도 판은 엄마가 그리웠다. 어떤 날은 너무 그리워서 눈이 멀 것 같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장래 희망을 써내는 종이 앞에서 판은 우두커니 한참을 생각했다. 짝꿍은 장래 희망에 ‘건물주’라고 썼다. 다른 친구는 장래 희망에 ‘임대업’이라고 써넣었다. 선생님의 질문에 “집에 가면 부모들이 모두 ‘임대업이 끝장이야! 건물주가 최고라니까!’라고 하시거든요”라고 했다. 판도 집에서 매일 듣는 소리를 써넣었다. “제 장래 희망은 이다음에 코끼리가 되는 겁니다.” “이 자식아! 왜 코끼리가 된다는 거야?” “엄마가 날 알아봐야 하니까요.” 할머니는 생활고로 인해 눈물이 나면 이유 없이 판을 두들겨패곤 했다. 눈 뜨고 한번 본 적도 없는 엄마를 어떻게 그리워할 수 있느냐고 거짓말 말라고 하셨다. 피가 달라 못된 것만 엄마에게 물려받았다고 냄비와 도마를 판에게 던졌다. 판은 할머니의 조언을 따라 맹인견 훈련을 받은 뒤 맹인이 된 아버지를 데리고 다녔다. 도시로 올라와 햄버거를 배달하던 할아버지가 쓰러지시고 전단지를 나르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택배 트럭에 치이기 전까지. 안방에선 엄마 냄새는 나지 않았다.

택배부터 피자까지 판은 배달의 민족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태풍 매미와 태풍 볼라벤, 태풍 루사 때는 날아오는 간판을 피해 달렸다. 얼마 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로 온 이유는 엄마의 새 주소를 겨우 알아냈기 때문이다. 이 동네 중국집에서 일하면 엄마가 자신에게 배달을 시킬지도 모른다. 엄마가 부르면 언제라도 판은 자신을 배달시키고 싶다. 하지만 엄마 집은 가난하다. 엄마와 남편은 밤늦게까지 생수 배달을 한다. 중국음식을 시켜먹지도 않는다. 판은 배달을 마치면 밤마다 코끼리 스티커가 붙은 바이크를 타고 엄마가 사는 연립주택을 서성거리다가 돌아오곤 한다. “엄마는 분명 날 닮아서 중국음식보다 치킨을 좋아하실 거야.”

김경주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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