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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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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액터 칼

등록 2015-04-30 16:44 수정 2020-05-03 04:28

칼은 슈트액터다. 슈트액터는 탈인형을 쓰고 연기하는 배우를 말한다. 칼은 최근 몇 년간 바이오맨부터 후레쉬맨, 울트라맨, 파워레인저까지 온간 히어로물의 영웅이 되어보았다. 아동극에서 수많은 캐릭터 인형을 쓰기도 했다. 공연이 끝나면 무대 뒤로 몰려드는 아이들을 상대해주어야 일당이 돌아온다. 아이들은 뽀로로에게 달려들어 발차기를 하거나 로보카폴리에게 주먹을 날리고 등 뒤로 몰래 와서 목에 매달린다. 꼬마버스 타요의 인형 머리를 벗겨보려고 울며 안간힘을 쓰는 아이들도 있다. 힘을 합쳐 가면을 합동작전으로 벗기려는 삼대 가족도 보았다. 칼이 인형 머리를 붙잡고 버티면 심지어 화를 내는 엄마도 보았다. “나 참! 아이가 우는데 한번 벗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사장 데려와! 이딴 서비스가 어딨냐구!”

한겨레 박미향 기자

한겨레 박미향 기자

그래도 가면만은 벗겨져선 안 된다. 가면은 칼의 일상이며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이다. 칼은 인형 속에 잘 숨어야 일당을 보장받는다. 실체가 궁금한 아이들을 위해 친절하게 인형을 벗어주면 그날로 프로답지 못한 영웅들은 거리로 쫓겨난다. 내일은 동물원에 가서 타조가 되어야 한다. 분명 타조의 코를 잡아당기는 녀석들이 또 있을 것이다.

칼이 슈트 의상을 집안으로 가져오는 일은 없다. 영웅은 바깥에서만 영웅이기 때문이다. 칼의 아이들은 그가 오늘은 놀이공원에서 어떤 영웅이 되어 세상을 구했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칼의 직업을 배우로 알고 있다. 배우는 맞다. 인형을 늘 써야 하는 배우지만.

칼은 얻어온 몇 장의 파워레인저 초대권을 자녀들에게 주고 싶어 만지작거리다가 포기한다. 슈트 의상과 가면으로 가려져 있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겁이 난다. 인형을 쓴 프로의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이기는 싫다. 언젠가 놀이공원에서 슈퍼맨 복장으로 첫사랑을 만났을 때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칼은 어색해하는 첫사랑과 그녀의 딸에게 솜사탕을 사주었다.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옛날 슈퍼맨의 약속을 솜사탕으로 갚을 수는 없었다. “아저씨가 아이언맨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칼은 이제 집에서도 가면을 벗지 못한다. 칼은 아내와 아이가 잠들면 조용히 아이들의 이불을 덮어준 뒤 부엌으로 나온다. 무거운 전신 슈트 의상을 입은 탓에 생긴 등과 목의 땀띠에 파스를 바른다. 슈트액터에게 여름은 죽을 맛이다. 전신 인형을 입는 일은 체력적으로도 힘들다. 칼은 인형 머리를 벗어들고 뒷골목으로 가서 담배를 피우다가 생각했다. ‘영웅들은 참 힘들구나….’

일이 없을 때에는 이벤트 업체에서 불러주는 일도 해야 한다. 팀 마스코트 인형 탈을 쓰고 새로 오픈한 매장 홍보를 하는 것이다. 피에로 복장에 높은 사다리를 타고 행인들에게 에어컨 전단지나 나이트클럽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일이다. 하지만 칼은 이제 그 일을 하지 않는다. 얼마 전 장모님이 우연히 교회 교구분들과 함께 칼의 앞을 지나가다가 그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김 서방, 진정으로 자네가 창피했네.” 저녁 무렵 장모님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당신은 명절 때도 찾아뵙지 않으면서 왜 하필 거길 가서 날 곤란하게 해!” “날 알아보리라곤 생각 못했어.” “그럼 나이트클럽 가는데 주변을 좀 살폈겠어. 우리 엄마가 얼마나 창피했을지 생각해봤어? 이 바보야 생각 좀 하고 살자, 생각 좀.” “여보, 난 인생이 쓸모없어지는 것보단 창피한 게 나은 거라고 생각해. 내가 쓴 인형은 가족에게 쓸모 있는 것을 가져다주잖아.” “하지만 난 인형이랑 살고 싶지는 않았다구.”

칼은 늘 멋진 액션배우가 되기를 꿈꾸었다. 하지만 엑스트라 배우 생활은 가난하고 어려웠다. 수많은 영화 오디션을 보기도 했지만 주로 자객이나 전쟁군인이었다. 주인공에게 얻어맞는 속칭 ‘방망이’가 되어주는 역할들이었다. 그러다가 이 일로 들어섰다. 분윳값을 벌기 위해 괴수·유령·마스코트 등 칼은 닥치는 대로 일했다. 주로 뒤집어쓰는 일이었다. 뒤집어쓰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김경주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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