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은 그라피티 아티스트다. 그라피티는 벽이나 화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말한다. 도구를 이용해 긁거나 파기도 하고 각종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 윌은 거리의 벽, 경기장, 테니스장, 지하철 전동차 등 단속을 피해 가리지 않고 그리곤 했다. 멍멍탕집에 개집 그림을 그렸다가 구치소에도 들락거렸다. 가끔 윌은 다른 나라의 파출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라피티는 벽을 보면 뭔가 남기고 싶어지던 인류가 선사시대부터 발전시켜온 낙서연대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에 질식된 사람들이 세상의 벽에 대고 낙서를 하기 시작하면서 표현법이 진화했다고 한다. 윌의 일과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고양이에게 밥과 물을 주고 약속이 있으면 약속을 지키려 하고 낮엔 수첩에 저장해둔 공간으로 현장탐색을 간다. 윌의 수첩엔 전세계의 끝내주는 벽의 위치들이 가득하다. 그중엔 독일 베를린장벽 같은 명소도 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뒷골목과 거리도 많다. 언젠가 그곳에 가서 마음껏 바밍(Bombing)을 해보고 싶다. 윌은 ‘원플러스원’ 삼각김밥 할인 기간이 끝나지 않은 편의점을 찾아 자리를 잡고 자신의 벽을 떠올리며 밤까지 기다린다. 머릿속에 스케치를 점검해보고 작업 방식을 계획한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는 추운 날엔 망치나 스프레이를 잡은 손끝이 부서져 떨어져나갈 것 같다. 재료비도 스스로 충당해야 하고 예술을 해주는 데 인건비 한 푼도 안 나오는 도시는 야박하다. 하지만 벌레 한 마리가 전력을 다해 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조그마한 틈이라도 찾기 위해 격렬하고 강렬한 에너지를 담기 위해 벽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그를 사람들은 벌레라고 부른다. 인파가 사라지고 단속하는 시선이 완전히 제거되면 윌은 스나이퍼처럼 벽까지 접근한다. 스냅백을 눌러 쓰고 가방에서 도구를 꺼낸다. 언제나 그랬듯이 벽은 차갑고 거칠다.
윌은 오늘의 블록버스터를 마무리하고 방으로 돌아온다. 자기 전에 고양이 똥을 치우고 샤워를 한다. 내일 아침 사람들이 자신의 에너지를 어떻게 볼지 생각하며 라면을 먹다가 미소를 지어본다. 관심을 받기 위해서라면 높은 벽에서 떨어지는 편이 낫다. 잠들기 전 자신의 벽 앞에서 캄캄했던 과거는 이제 끝났다.
윌은 어릴 적부터 공용화장실의 낙서에 호기심이 많았다. 누군가 화장실 벽에 남겨둔 에너지는 박진감 넘치고 애처로워 보였다. “사람들은 왜 화장실만 오면 애인을 구하고 싶을까?” 몇 년 뒤 윌은 우연히 어릴 때 집을 나간 아버지를 지방 버스터미널에서 목격했다. 겨드랑이에 털이 나기 시작한 윌을 아버지가 못 알아보는 것은 당연했다. 윌은 아버지를 미행했다. 윌의 아버지는 노숙인처럼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가서 한참 뒤에 나왔다. 손에 매직펜을 들고 히죽이고 계셨다. 윌은 더 이상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았다. 자신도 아랫배가 너무 아팠고 아버지처럼 자신의 볼일을 먼저 보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보는 습관 때문이었다. 윌은 대신 아버지가 사용하던 변기로 가서 엉덩이를 까고 앉았다. 아버지가 데워둔 변기의 온도가 아직 남아 있었다. “고작 남겨준 게 이번에도 자기 냄새뿐이군!” 고개를 들고 윌은 화장실 벽을 보았다. “아들을 본 것 같다. 돈 좀 달라 할까?” 아버지의 필체였다. 10년 뒤 윌은 열아홉 번째 이력서 작성과 면접 후 같은 버스터미널 화장실에 앉아서 누군가 스텐실을 해놓은 것을 더듬고 있었다. 윌은 다시 한번 눈물이 핑 돌았다. “틈만 나면 살고 싶다.” 윌은 열심히 살고 싶었는데 열심히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아르바이트도 어떤 정치인도 어떤 선생님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다른 작업에 비해 그라피티는 속도와 용기가 필요하다. 윌은 인생은 거창한 거짓말을 하기 위해 서로의 벽 앞에서 조금씩 애써줘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WILL’. 언젠가 통일이 되면 평양의 벽에 가서 윌이 꼭 스텐실을 하고 싶은 문자다.
김경주 시인·극작가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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