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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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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상담사 융

등록 2015-07-03 13:25 수정 2020-05-03 04:28

융은 대출상담회사에서 전화받는 일을 한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은행 문턱을 못 넘는 사람들이 융이 근무하는 제2금융사에 전화를 걸어온다. 제2금융은 빚을 빛으로 바꾸어주는 곳이다. “사람들은 제2금융은 믿을 게 못 된다고 말하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예요. 하루 200만 명이 우리 덕에 목숨을 건지는걸요.” 융은 왕성한 실적으로 우수사원이 되어 회사 사보에 인터뷰 글이 실렸다. 이를 본 대표의 눈에 들어 얼마 전엔 회사 상품의 광고 모델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한겨레 윤운식 기자

융은 촬영에 들어가자 CM송을 불렀다. “급전 필요할 땐 러쉬 앤 프레쉬! 가족도 외면할 땐 러시 앤 프레쉬! 신용은 절망. 대출만 희망. 사람은 불신. 이자는 확신. 우리만 맹신. 갈 곳이 없으면 찾아줘. 전화 한 통이면 해결돼. 당신은 정말 소중해요.” “추신 (빠른 목소리로) 계약은 만기 후 바뀔 수 있으며 환급 전 한강에 뛰어들면 장기를 떼어갑니다.” 융은 대출계 업자들 사이에서 금방 유명세를 탔다.

그리고 얼마 전 선을 본 남자 앞에서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실패한 삶을 잘 못 믿어요. 희망은 항상 무료니까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자신을 속일 수 있잖아요.” 융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대출 상담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융이 선을 본 상대는 오십이 넘은 대머리 노총각이었는데 침을 흘리며 융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저도 제2금융 대출로 고비를 넘기고 지금은 동네에서 작은 부동산을 합니다. 저희 둘이 함께 살면서 머리를 맞대면 세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박융자씨! 저랑 계약하시죠?” “지금 저에게 프러포즈하시는 거예요? 가족계획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둘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신용등급이 몇 등급이죠?” “아직은 좀 낮지만 전 건강해요. 장기도 멀쩡해요.” “정말이에요? 오십 넘으면 장기는 무용지물이거든요.” “사실 대학 때 학자금 이자 때문에 사채를 썼다가 신장 하나를 내주었어요. 하지만 전 신장이 두 개까진 필요 없어요. 간도 내 몸에 비해 너무 커요. 융자씨랑 살면서 어려우면 얼마든지 전 헌신할 수 있어요. 이 눈동자도 아직 상하진 않았어요. 어려울 때 안구 하나 내다팔아도 끄떡없어요. 이제 한 눈으로 세상 보는 법도 충분히 익혔어요.” “내일 회사 끝나고 함께 안과에 가봐요. 가봐야겠어요. 오늘 밤을 넘기기 전에 전화를 드려야 할 고객이 있어서요.” “아니 이 밤늦은 시각에 고객에게요…?” “네, 이 시간 정도면 원금도 못 갚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사실 융이 하는 전화 업무의 태반은 대출 상담이라기보다 이자 독촉이나 원금 상환 독촉이다. “사람들은 말하곤 해요. 죽기 전에 모두 갚겠다고. 하지만 모르는 소리. 하루 200만 명이 우리를 피해 어디론가 숨어요.” “맞아요, 융자씨. 사람들은 자신이 쓸모 없다는 걸 잘 못 믿어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모두들 자기 신용이 최고라고 생각하죠.”

융의 월급은 원금도 못 갚고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막아야 보장된다. 융은 매일 오전 대출을 이용한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이자와 완납이 가능한지 경제 상태를 확인하고, 매일 밤엔 다시 심리 상태를 체크해야 한다. 절망에 빠져 헤매다가 이름도 나이도 몰라보던 사람들이 금방 돌변하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가망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겐 과감하게 장기로 보증하라는 서류를 권하는 편이 낫다. 한강이나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장기도 못 건지기 때문이다. 그런 날엔 대표에게 사무실 구석에서 수도 없이 따귀를 맞고 치마 속으로 들어오는 두꺼비 같은 손을 물리칠 수 없다.

융은 여상을 졸업하고 건설회사에서 몇 년간 경리를 하다가 부장과 눈이 맞아 회사 돈을 횡령해서 달아났다가 붙잡혔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에게 상상할 수 없는 빚이 쌓여 있었다. 부장은 시멘트가 담긴 드럼통 속에서 머리만 내놓고 글썽거리고 있었다. 어디론가 굴러갈 거라고 했다. 소문엔 바닷속으로 내려간다고 들었다. 부장과 작별 인사를 하고 계약서를 썼다. 그리고 융은 대출회사의 용역이 되었다. 섬으로 팔려가는 것보다는 이쪽 일에 빛이 보였기 때문이다. 융도 몇 번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자신을 속여보았다. 융은 고객에게 매일 빚이 빛으로 바뀔 거라고 강조한다.

김경주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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