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쾡의 여명

등록 2015-05-07 18:53 수정 2020-05-03 04:28

쾡은 얼마 전에 종합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여명을 선고받았다. 췌장암 말기 확진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복부에 암이 살림을 차린 지 꽤 되었다고 했다. 쾡은 믿을 수가 없었다. 헬스로 꾸준히 몸 관리를 잘했고 엉덩이도 아직 탱탱하고 승모근도 오목했다. 비타민, 강장제, 아로나민, 프로폴리스, 건강보조제도 빠지지 않고 챙겨 먹었다. 쾡은 화가 나서 의사의 멱살을 붙잡았다. “보통 가족에겐 숨기는 게 정상입니다.” 의사의 말을 따라 일단 가족에겐 숨겼다. 의사는 일단 쾡의 몸에 자리잡으려고 여기까지 온 암세포의 노고를 인정해주자고 했다. 고통을 줄이고 싶다면 좀 비싸지만 신약으로 개발된 항암제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간호원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쾡은 믿을 수 없다고 중얼거렸다. 급기야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간호원은 “여자 말 좀 들으세요!”라고 말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한겨레 신소영 기자

“나보고 여자 말을 믿으라고?” 쾡은 여자 말을 믿지 않는다. 쾡이 믿은 여자 목소리는 엄마 말과 내비게이션 목소리뿐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쾡의 나이 다섯 살에 돌아가셨고, 내비게이션은 오십에 뜯어버렸다. 두 여자 모두 사는 동안 쾡의 길을 자주 잃게 만들었다. 쾡은 병원을 나와 놀이터에 앉아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까지 들고서 우두커니 저녁이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쾡은 중얼거렸다. “달콤하다. 이렇게 쥐고만 있어도 녹아버리는 게 인생이구나.” 쾡은 자신이 다녔던 초등학교 쪽으로 걸었다. 쾡의 최종 학력은 여름성경학교다.

쾡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했다. 서울 신대방동 일대에 단란주점 2곳을 가지고 있다. 쾡은 노력파였다. 완전히 세상에서 자리잡았다. 암세포도 노력파였다. 완전히 쾡의 몸에 자리를 잡았다. 집에 돌아오자 가족이 거실에 앉아 독거노인을 다루는 뉴스를 보고 있다.

“몰래 죽어서 저렇게 썩어 있으면 누가 치우나?” 쾡은 자신의 피가 자식들에게 말라붙어 있을까봐 겁이 난다. 지난해부터 자식놈들이 모이기만 하면 유산을 n분의 1로 나누어야 한다며 옥신각신하다가 난투극을 벌였다. 쾡은 가족 앞에서 여명을 알렸다. 병원에서 고통받느니 소박하게 집에서 마무리하고 싶다고 전했다. 큰놈은 이 집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며느리는 장례는 대학병원에서 해야 말이 안 나온다고 예약날짜를 알아본다. 막내아들은 쾡이 운영하는 단란주점에 가서 어미·아비도 몰라보는 비싼 술만 먹고 들어온다. 환율도 변하는데 자식놈들은 시간이 흘러도 하나도 안 변한다. 쾡은 방으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쾡은 양로원으로 들어왔다. 밤이 오면 돌아누워 울음을 닦았다. 아침이 오면 웃음만 나온다. 쾡은 삶이 가여워서 자주 웃어준다. 삶을 속여서 여기까지 온 것일까? 자주 묻게 된다. 열심히 삶을 속여도 늙는 건 못 막았다. 발이 차가워진다. 별이 차가워진다. 눈물이 차가워지려 한다. 쾡은 양로원에서 죽기는 싫었다. 베개에 살 썩는 냄새만 피우다 가는 것이 두려웠다. 돌아누워 자다가 어느 날 저승사자가 깨우면 따라갈 모습을 생각하니 자존심도 상했다. “사람들은 내 입가에 흘러내린 침도 닦아주지 않고 영안실로 데려가겠지.”

쾡은 모텔로 왔다. 죽으러 온 것이다. 여기라면 좋은 여행이 될 것이라고 생각됐다. 아무도 모르게 해치우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게 외롭지만. 잘 선택한 것 같다고 여겼다. 연탄을 피운다. 연기가 꽉 찬다. 입가가 따갑다. 숨 쉬기가 곤란하다. 가슴이 답답하다. 일단 창문 좀 열자.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늙으면 비겁해질 뿐이구나.” 웃음이 픽 나왔다. 죽음은 딱 한 번 오지만 거짓말은 안 하는 법이다. 쾡은 너무 쓸쓸해 죽으러 모텔에 왔지만 죽는 게 더 쓸쓸해서 돌아가게 될 줄은 몰랐다. 쾡은 눈물이 흘렀다. “이게 다라면 우스워.” 쾡은 모텔 밖으로 나오며 암도 몸의 일부니 잘 데리고 살다가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달 뒤 가족들이 쾡의 주검을 발견한 건 어머니 산소 옆에서였다. 쾡은 아내 옆에서 미소를 지었다. “여보, 우리 사이좋게 살았으니 사이좋게 죽자. 이봐, 이제 날 좀 마중 나와줘….”

김경주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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