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은 에베레스트의 고봉을 오른 몇 안 되는 산악등반인 중 하나다. 사람들은 그의 무모한 산행과 도전을 높이 평가했다. 탈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뒷산과 야산의 구릉들을 오르며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곤 했다. 청년기엔 입시보다 등반가가 돼야겠다는 꿈을 품었고 마음속에 에베레스트의 원정대를 이끈 존 허트경을 항상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20년 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내려오자마 탈은 유명세를 탔다. 에이전트 회사의 직원 하나가 탈에게 제안을 해온 것이다.
“산을 정복하고 나면 기분이 어떠세요?” “정복이라는 단어는 산악인들의 정서에는 맞지 않아요. 군사정권의 용어이기도 하고요. 등정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선생님, 가족을 두고 다시는 산에 오르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습니다.” “산에 오르면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일을 하시며 살아보시면 어떨까요?” “실버원정대 같은 것을 꾸려달라는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정상이 정상에게 노하우를 전하는 일들입니다. 수입이 꽤 좋습니다.” 탈은 정부와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상대로 고액의 수입이 보장되는 특강을 제안받았다. “정상에 오르고 싶은 사람들에게요?” “네. 정상에 오른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해주시면 됩니다.” 에이전트는 끊임없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강의를 연결시켰다. 정부와 기업, 방송사와 연예인들을 상대로 시작한 강의가 몇 년 뒤엔 초·중·고등학교로 퍼졌고 수녀원과 재활원, 소년원, 군부대까지 이어졌다. 사투를 벌이며 최고봉에 오른 자에게 듣는 ‘정상과 극복’이라는 테마는 어려운 시절의 사람들을 상대로 벌이기 좋은 사업 테마였다. “IMF와 FTA를 거친 뒤 강한 종만이 살아남는다는 최적자 생존 법칙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당분간 선생님의 강의는 먹이사슬의 최고 윗자리에 있을 겁니다.”
TV에 몇 차례 나간 뒤론 ‘정상 노하우 전담 힐링 학원’을 동업하자는 제안도 들어왔다. 통장엔 에베레스트에서 하루아침에 불어나던 폭설처럼 돈이 불었다. 탈의 강연 제목은 주로 ‘정상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이거나 ‘그곳에 정상이 있으므로 오늘도 나는 오른다’ 같은 것이었다. 연단에 올라 결기에 가득 찬 표정으로 정상에 오를 때의 감격과 최고봉에 오르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 등을 들려주면 청중은 입을 벌리고 감탄을 하거나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무한경쟁 시대에 탈의 정상을 향한 도전기는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광고도 들어왔고 월세와 전세를 전전긍긍하던 시절은 갔고 훌륭한 가족의 보금자리도 생겼다. 아이들도 탈을 자랑스러워했다. “우리 아빤 이 세상에서 최고 높은 곳에 가본 사람이야.”
탈은 주변인들에게 점점 욕을 먹기 시작했다. 더 이상 산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탈은 변했어. 정상회담에만 정신이 팔려 다시는 산에 오르지 못할 거야.” 탈은 점점 고독해졌다. 눈 덮인 산 위에서 외로움으로 가슴이 충만해지던 시절이 그리웠다. 눈 속에 파묻혀 자다가 입안에 가득한 얼음알갱이들을 뱉어내며 아침 햇살을 받던 그의 눈빛은 컴컴해졌다. “눈 속이나 산에선 숨어 있기 좋았는데… 이제 난 숨을 곳이 없어져버렸어.” 탈은 전국마술협회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특강을 마친 뒤 근처의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마술의 영역도 잘은 모르지만 장비나 빙벽 기술처럼 테크닉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넘어서야 할 고산일수록 모험과 불확실성이 더 매력으로 우리를 이끌 듯이요.” 탈은 소주를 마시며 생각했다. 단독등반과 무산소 지역을 통과하며 등정에 목적을 두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 자체를 사랑하는 등로주의자였던 자신을 떠올려보았다. 다음날 탈은 집 근처 북한산을 올랐다. 남들이 얼굴을 알아볼까봐 두건과 마스크를 착용했다. ‘생존과의 사투를 벌이다보니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탈은 산을 오르며 생각했다.
김경주 시인·극작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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