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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세술 위한 TV 가이드

<시간여행자 K> <속사정 쌀롱> 등 방송의 새 트렌드 지식 예능… 다른 관점의 성찰 주지만 결국 처세술 조언에 가까워
등록 2015-03-11 15:19 수정 2020-05-03 04:27

일요일 밤, TV를 트니 한 채널에서 진보 논객으로 잘 알려진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인간 심리 현상에 대해 열심히 설명 중이다. 옆에는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 강용석 변호사가 그의 말을 받아칠 준비를 하고 있다. MBC 시사프로그램 의 한 장면이라 해도 믿을 법한 이 모습은 JTBC 토크쇼 2회의 한 풍경이었다. 수요일 밤의 한 음식프로그램에서는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가 한국인 입맛의 변화에 대한 지식과 식재료에 대한 철학을 진지하게 설파한다. KBS 교양프로그램 에나 어울릴 만한 장면인데 정작 이 음식프로그램의 장르는 예능이다. tvN의 음식토크쇼 얘기다. 바야흐로 지식을 품은 예능이 주목받고 있다.

종편의 제작비 절감 욕구

올해 초, KBS가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대대적으로 단행한 신년 개편에서 주요 키워드 중 하나로 ‘지적 호기심’을 내세운 것도 이러한 예능 트렌드 안에 위치한다. 예컨대 개편과 함께 선보인 파일럿 프로그램 는 연예인 패널들이 일상의 작은 현상을 두고 과학·의학·사회·경제·법률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더불어 다양한 파급효과를 예측하는 지식 게임쇼였고, 정규 편성된 는 광복 이후 70년 동안 한국의 사회문화사를 되돌아보는 지식토크쇼다.

후광효과, 군중심리 등 다양한 심리 현상을 소재로 패널들이 진지하면서도 얕은 대화를 나누는 지식예능 프로그램 〈속사정 쌀롱〉.  JTBC 제공

후광효과, 군중심리 등 다양한 심리 현상을 소재로 패널들이 진지하면서도 얕은 대화를 나누는 지식예능 프로그램 〈속사정 쌀롱〉. JTBC 제공

방송가의 중요한 트렌드로 떠오른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요즘 들어 갑자기 나타난 형식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인포테인먼트 장르에 속한다. 교양지식과 정보를 예능에 접목한 이 장르는 국내에서는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체제에 들어서며 방송가 내부에서는 제작비 감소의 필요성, 외부적으로는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계발 기술과 실용적 정보 습득 욕구의 증대 등 여러 요인이 결합해 그 환경에 최적화된 콘텐츠로 탄생한 것이 바로 인포테인먼트 장르다. 이 장르의 시초가 된 SBS 과 , MBC , KBS 등과 같은 프로그램이 당시 인기를 끈 대표적 프로그램이다.

그 뒤 리얼 버라이어티, 서바이벌 오디션 등 예능의 주류 장르가 계속 바뀌는 동안 명맥만을 유지해오던 이 장르가 근래 다시금 인기를 모으는 것에도 유사한 배경이 작용한다. 장기 불황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생활경제 정보에 대한 대중의 욕구와, 2011년 개국하며 적은 제작비로 안정적인 시청률을 확보해야 했던 종합편성채널의 내부적 요인이 결합해,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을 주력 콘텐츠로 내세운 것이 이 장르의 부흥을 불러온 것이다. 실제 MBN 이나 TV조선 등과 같은 프로그램은 모두 건강관리와 생활경영 정보를 주요 소재로 내세우고 있다. 이들은 말하자면 불황 시대에 필요한 직접적인 생존기술 안내서로 ‘먹고사니즘’만이 최고의 관심사가 된 대중을 TV 앞으로 불러모은다.

정보에 관점을 더하니

그런데 최근 주목받는 또 다른 경향의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들이 있다. 이들은 건강·생활 정보 위주의 천편일률적 소재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내용으로 눈길을 끈다. JTBC , tvN 등이 그것이다. 은 연애심리와 성담론을 ‘19금’ 토크로 풀어냈고, 은 다문화를 소재로 한다. 은 인간 심리를 분석하는 고품격 심리토크쇼를 지향하며, 는 음식에 대한 문화적인 설명이 곁들여진 토크쇼다. 이들은 하나같이 교양지식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분야를 주제로 삼고 있다.

이 프로그램들의 흥미로운 특징은 기존의 단순한 정보 전달에 그치지 않고 다른 관점의 성찰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가령 연애지식 토크쇼로서 의 남다른 의미는 여성이 성적 욕망을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지점에 있다. 연애 칼럼니스트 곽정은은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여성의 성심리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내고, 여성 게스트들도 성에 대해 적극적이고 열린 태도를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은 각각 다른 문화권 출신의 외국인 출연자들을 통해 국내의 관습적 가치관을 낯설게 바라볼 기회를 준다.

도 마찬가지다. 이 프로그램이 후광효과, 군중심리 등 다양한 심리 현상을 소재로 우리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분석하는 것은 인간과 세상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음식의 역사와 유래를 설명하고 음식의 재료를 대하는 요리사의 윤리까지 비평 대상에 올려놓으며 맛 평가를 중심으로 한 음식프로그램과는 사뭇 다른 접근법을 선보인다.

하지만 크게 볼 때 이러한 지식 예능 역시 결국 최소한의 생존이 화두인 불황 시대의 처세법, 그 실용주의적 성격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들 프로그램 대부분이 의뢰인의 사연에 대한 상담과 문제 해결 형식을 띠는 것은 그래서다. 이를테면 은 연애시장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한 판단의 기술, 은 개인적인 생각과 행동이 ‘비정상’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논리의 기술, 은 타인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는 관계의 기술을 가르친다.

이 또한 지식의 처세법

이들 프로그램의 색다른 관점이란 결과적으로 처세의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는 조언에 가깝다. 도 최적의 취향을 발견해 소비의 실패를 줄이는 안내 프로그램이지 않은가. 요컨대 최근의 지식 예능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나열하고 전달하는 데에서 한 걸음 나아가 분석과 해설을 더해 한층 꼼꼼하고 친절해진 처세 가이드에 가깝다. 갈수록 선택의 기회와 자유가 줄어드는 시대에 어쩌면 이 또한 지식이 찾은 최소한의 처세법일지도 모르겠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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