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랩을 안 할 거예요.”
래퍼 키비(kebee)가 말했다. 시적인 가사, 감성적인 랩을 하는 뮤지션이면서 힙합 레이블 소울컴퍼니의 설립자였던 키비는 랩을 하는 대신 자신이 써온 글을 읽겠다고 했다. “평소에도 제가 살면서 느낀 이야기들을 랩으로 많이 써요. 셰인 코이잔의 를 읽고 나니 고등학교 시절의 제가 지금의 저에게 이야기해주는 게 떠올랐어요. 그래서 그때를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생각해서 썼습니다. 저의 수줍은 고등학교 시절입니다.”
랩인 듯 시인 듯 읊조리다
는 캐나다 공연시인 셰인 코이잔이 어린 시절 왕따와 괴롭힘을 당했던 경험을 쓴 시다. 이 시를 리듬감 있게 감정을 실어 랩하듯 낭독하는 ‘포에트리 슬램’(Poetry Slam) 영상(영어 원제목: To this day project)은 유튜브에서 1400만 건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다. 사람들은 셰인 코이잔의 ‘포에트리 슬램’을 듣고 보면서 시에 담긴 메시지에 주목하며 위로를 얻기도 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 아팠던 내밀한 경험을 꺼내놓기도 했다.
12월3일 저녁 7시30분 서울 건국대 예술대학 1층 케이유시네마테크에서는 ‘포에트리 슬램’을 포함해 시와 랩을 결합한 다양한 실험을 선보이기 위한 ‘이브닝 라임’ 세 번째 공연이 열렸다. 힙합 그룹 가리온의 멤버 엠씨 메타와 시인 김경주, 음악평론가 김봉현이 만든 프로젝트 그룹 ‘포에틱 저스티스’(Poetic Justice·시적 정의)가 기획한 공연이다.
래퍼 키비가 에 영감받아 쓴 ‘경쟁의 연가’를 차분하게 읽어나갔다. “질 싸움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체 싸움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싸움을 한다는 건 내가 진다는 의미였으니까. 학교에 가던 그 시절 경쟁이 싫고 두려워서 그래서 그들 사이 어디에도 끼지 않았다. 반 뒤편 게시판 등수가 나열된 성적표에도, 쉬는 시간마다 몰려나가는 농구 코트에도, 화장실 맨 뒤칸에서 나눠 피우던 담배 연기 밑에도. 난 어디쯤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랩을 하지 않겠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입에선 글을 읽는 중간중간 랩이 흘러나왔다. “처음 랩을 했던 고등학교 1학년, 처음 내 목소리를 크게 내어 말하며 제법 어른스러워졌다고 느꼈지. 아니 어쩜 그 시절에 내가 가장 성숙했는지도 모른다. 경쟁에서 이탈하는 것이 불안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지금도 나는 변한 게 없는데 경쟁의 시스템은 이전보다 더 공고해지고,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 한 움큼씩 초조해 있고 모두가 무언가에 조금씩 화나 있는 게 당연해져버렸다. 난 힙합을 통해서 무리 속 경쟁에서 이탈해 있었는데, 그 힙합이 피 말리는 경쟁의 역사 속에서 발전해오고 있다는 게 나에겐 뭔가 아이러니해. 여전히 경쟁은 나에게 너무 무겁다.”
래퍼가 다른 텍스트를 읽는다면?
김봉현 평론가는 “래퍼가 랩이 아닌 다른 텍스트를 읽을 때 어떤 효과가 날까, 고민하며 만든 무대다”라고 설명했다.
래퍼가 한국작가회의 40주년을 기념해 김근·김경주·진은영 시인 등이 쓴 ‘젊은작가선언’을 낭독할 때 그 울림은 꽤 컸다. 모자를 꾹 눌러쓴 키비는 “문학은 숨 쉬는 경험으로서 더 이상 이 사회에 호흡을 실어나르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문학은 공존이라는 인간의 문제를 잃어버렸고, 작품 속에서 인간을 버렸다”는 문장을 뱉어냈고 “우리는 문학을 다시 믿는다. 그러므로 작가들이여! 오늘날 우리는 그 어떤 시대보다 재능을, 그리고 그보다 더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문학에 인간이 살 수 없다면 우리의 언어는 모두 저승일 테니”라고 ‘문학’을 호명했다.
이날 공연은 ‘시와 랩의 연결고리’를 끊임없이 찾고 되새김질했다. 데뷔 앨범부터 ‘라임의 마스터’란 찬사를 받았고 지난해 낸 3집에서 “우리말 라임의 미학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은 피타입은 아예 ‘스티브 잡스’에 빙의해 “밤새 만든 PPT, 죽이지 않냐”며 파워포인트(PPT)를 틀어놓고 강연했다. 피타입은 “랩(RAP)이 ‘리듬 앤드 포에트리’(RHYTHM AND POETRY)의 약자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 꽤 적절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피타입에 따르면, 래퍼는 결국 목소리를 통해 노래하는 보컬리스트다. 래퍼는 노래 중에 하나의 장르인 랩을 한다. 음악은 리듬과 멜로디로 구성되는데, 랩은 그 가운데 멜로디를 걷어낸 장르다. 따라서 리듬이 극대화된다. 랩을 포함한 노랫말의 재료인 언어는 소리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언어에서 의미적 요소가 부각되면 문학이고 소리적 요소가 부각되면 음악이다. 노랫말로 언어를 쓸 때는 당연히 소리적 요소를 부각해야 하고, 라임을 사용한다. 시 역시 언어에서 라임 등을 사용해 음악적 요소를 강화한 문학 장르다. 돌고 돌아 피타입의 결론은 (라임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시는 곧 노래요, 노래는 곧 시”다.
피타입이 스티브 잡스 빙의를 끝내고 부른 노래 두 곡은 모두 래퍼의 시인 정체성을 잘 드러낸 노래들이다. (Musiq Noir)에서 그는 “이 도시의 밤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머리 속에 서서히 떠오르는 것들을 모아서 시를 썼어”라고 노래하고 “내 낡은 노트에 내려앉은 기록된 기억”들을 말하는 노래의 제목은 아예 ‘시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Poetry Sayer)다.
“공통적으로 신경질을 갖고 있다”?이들은 왜 시와 랩의 연결고리를 찾아헤매는 걸까. 김경주 시인은 “지금은 정의는 실종돼 있고 선언이 부족한 시대다. 시대가 상실증후군을 앓고 있다. 차갑게 아이들이 가라앉은 상황에서 ‘어른’은 실종됐다. 그런데 시와 랩은 어떤 선언도 고백도 하지 않는다. 왜 래퍼들이 거리에서 랩으로 1인시위를 하지 않는가. 왜 요즘 시대에 화가 나 있는 작가는 없는가. 이런 시대에 시적 선언이 필요하고 시적 선언을 하기 위해서는 시와 랩이라는 장르가 공통적으로 둘러싸여 있는 편견을 벗겨야만 한다”고 말했다. 김봉현 평론가는 “모든 힙합이 저항적일 필요는 없지만, 힙합의 뿌리에서 보건대 사회적 메시지나 저항적 메시지를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할 장르는 힙합이라고 생각한다. 힙합 음악의 뿌리가 가난하고 위험한 동네에서 사는 흑인들의 저항적 메시지와 자유로운 분위기를 담아내면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힙합에는 사회적 발언을 담거나 저항을 담아내는 힙합 본연의 정신이 부족하다. 세월호 사고 이후 희생자를 애도하거나 구조적 문제를 비판한 힙합 뮤지션이나 래퍼는 손에 꼽는다. 시와 랩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것은 랩에서 메시지를 강화하고, 그 메시지에서 사회에 대한 저항과 발언을 회복하는 하나의 경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엠씨 메타 역시 “최근 힙합이 인기몰이를 하고 래퍼 지망생이 늘어나면서 래퍼들의 실력은 갈수록 좋아지는 데 반해 랩에 담긴 메시지나 실험성은 점점 더 빈약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엠씨 메타는 “저에게 있어 랩을 하는 것은 시를 뱉고 시를 쓴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시와 랩의 연결고리를 찾는 시도를 통해 스타일로만 가득 찬 지금의 힙합신이 메시지를 회복하는 데 물꼬를 텄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시와 랩의 연결고리를 찾는 방법으로는 프리스타일 랩도 빠지지 않았다. 신인 래퍼 서출구는 김경주의 시 세 편을 읽고 그 시의 감정을 이어받아 즉흥랩을 했다. 김경주의 미발표시 ‘코털은 의외로 빨리 자란다’를 낭독한 뒤 “나 역시 코털이 많아. 여기 모든 사람은 코털이 많아. 나의 코털, 너의 코털, 우리의 연결 코털 (중략) 나는 성격이 더러버 내 애인은 나한테 서러버 (중략) 내 코털을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나의 코털을 사랑해주는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들의 연결 코털”이라는 즉흥랩을 하는 식이다. 서출구는 즉흥랩에서 ‘시와 랩의 연결고리’를 찾는 무대의 성격을 담아내고 시와 자신의 감정은 물론, 미국에서 살며 느꼈던 고립감 같은 경험까지 풀어놓으며 객석과 공감했다.
마지막 순서로 이 공연을 기획한 ‘포에틱 저스티스’는 시를 랩으로 노래하는 ‘포에트리 슬램’ 퍼포먼스를 했다. 김경주 시인이 자신의 시 ‘바늘의 무렵’ ‘나쁜 피’를 읽고 엠씨 메타가 시의 원문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랩으로 부르는 방식이다. 김경주 시인은 “낯설겠지만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그냥 보여드리겠다. ‘이해하기 위해선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라는 대사를 최근 올린 뮤지컬 공연에 쓴 적이 있다. 지금 저에게 해당하는 말이다”라고 덧붙였다. 엠씨 메타는 “랩도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 건드릴 수 있는 가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시와 같다. 시 역시 그 자체로 랩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 힙합 장르에 씌워져 있는 이상한 편견을 벗기고 싶다”고 말했다.
낯선 방식이 선물한 시에 대한 호기심‘이브닝 라임’ 공연에 대해 관객들은 “낯설다” “신기하다” “실험적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김한울(20)씨는 “원래 힙합 장르를 좋아하고 오늘 공연한 뮤지션들은 대부분 아는데 이런 방식인 줄은 몰랐다”면서도 “오늘 래퍼들이 읽고 부른 시가 어떤 시인지 원문을 꼭 찾아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추영민(19)씨도 “낯설기도 했지만 랩이 새롭게 다가왔다. 의미를 계속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포에틱 저스티스의 공연은 계속된다. 앞으로 열릴 공연에서는 ‘성형미인’ 등의 사회적 주제를 놓고 엠씨 메타가 쓴 랩과 김경주 시인이 쓴 극복 등을 결합해 랩드라마 형식으로 시와 랩의 연결고리를 찾을 예정이다. 12월 중순쯤에는 ‘안티 쇼 미 더 머니’ 형식의 팟캐스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경쟁을 통해 또 하나의 래퍼 아이돌을 양산해내는 ‘쇼 미 더 머니’가 아니라 셰인 코이잔이 ‘포에트리 슬램’을 통해 왕따 경험을 극복하고 자존감을 회복한 것처럼 누구나 랩이나 시를 쓸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사람들이 쓴 시와 랩을 평가함으로써 ‘극복’을 돕는 팟캐스트다. ‘포에틱 저스티스’는 시와 랩의 연결고리를 통해 시대가 상실한 정의를 길어올리려는 뜻깊은 시도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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