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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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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원한 마왕’

사회와 늘 뜨겁게 공명했던 신해철의 음악과 인생…
그를 통해 자기정체성을 쌓아올린 신해철 세대들 ‘마음의 빚’
등록 2014-11-05 15:12 수정 2020-05-03 04:27

2014년 10월27일 저녁 8시19분. 1990년대 대중문화 황금기의 한 축을 담당했고, 2014년까지 20여 년 동안 음악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건재했던, 그리고 체제에 곱게 순응하지 않았던 한 대중음악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신해철은 음악을 통해 늘 인생, 행복, 꿈, 가치를 질문했다. 철학이 사라져가던 시절에, 정해진 궤도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거냐’ ‘어떻게 살 거냐’ ‘꿈은 뭐냐’ ‘좋아하는 건 뭐냐’라고 끊임없이 물었다. 로 알려진 무한궤도 시절인 1989년에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홀로 걸어가네”라며 를 노래했고, 1991년 발표한 2집에서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의 불꽃 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라고 를 썼다. N.EX.T 1집의 마지막 트랙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에 길들여짐이지/ 남들과 닮아가는 동안 꿈은 우리 곁을 떠나네”라고 읊조렸고, N.EX.T 2집의 마지막 트랙에서도 역시 “그대여 꿈을 꾸는가 너를 모두 불태울 힘든 꿈을”이라며 ‘꿈꾸는 자’를 응원한다.
30대가 된 뒤에도 그는 “선생님 내게 가르쳐주신 건 모두 거짓말이었나요/ 책에서 본 것과 세상은 달라요”(1998년 )라고 냉소했고,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1999년 )를 묻고 또 물었다. 6년 만에 뮤지션으로 돌아온 신해철은 6월 발매한 새 앨범 에서도 “학교를 갔어도 졸업이 업이 안 돼, 장가를 갔어도 글쎄 어째 애가 안 생겨. 애아범이 돼도 철이 들질 않아 전혀… 호떡 같은 세상을 끝도 없이 뭉개는 우리/ 쉰 떡 같은 세상을 느리게 더 느리게/ 널 볼 수 있게 천천히 걸을까 멈추지 말아볼까” 이야기했다. 그는 자발적으로 철들지 않는 ‘마왕’이었다.
신해철의 음악과 인생이 사회와 늘 공명했기에, 그의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은 슬프다.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는 “그는 ‘음악하는 사회학자’였다. 대학원생일 때 들었던 에 담긴, 사회운동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생의 본질적 고민에 굉장히 공감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명징한 발언들은 독설로 오해받았지만, 사실 독설이 아니라 현실을 포장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고 말했다. 노명우 교수는 “예술을 진공상태에 가두지 않으면서도 아티스트로서의 음악적 성취도 함께 했던, 대한민국에는 없는 종류의 아티스트였다. 그런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 함께 늙어갈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의 앞으로의 궤적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문학)는 “1990년대는 대중문화를 통해 자기정체성을 형성한 최초의 세대가 성장한 시대였다. 신해철은 당시 ‘자유주의의 첨단’에 서 있었는데 이들 세력은 대학에서 운동권과 혼합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긴장관계에 있었다. 두 세력 가운데 중도층이 정치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고 ‘신해철 세대’를 설명했다. 이택광 교수는 “신해철의 죽음은 돌이켜보니 희망이 있었던 한 시대가 저물어간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고 비극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형태의 죽음이어서 슬픔이 배가된다”고 말했다. 신해철의 가족들은 발인 하루 전인 10월30일 신해철이 장협착 수술을 받았던 서울 스카이병원을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신해철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자기정체성을 쌓아올렸던 세 사람의 ‘마음의 빚’을 들었다. 슬픔이 여전한 시절에, 슬픔이 하나 더해졌다. 박수진 기자


케이시에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케이시에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아프지만 마. 여러분, 아프지만 마세요’

부산의 작은 방이었다. 친구의 고등학생 언니가 곳곳에 비밀을 숨겨둔 예쁜 방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나와 친구는 언니 방에 몰래 들어가 ‘얄리’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이오공감, 015B 다 그렇게 만났다. 를 듣고서야 초등학교 때 쓰러져 회색 눈꺼풀을 보여줬던 내 병아리들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노래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죽음’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성찰의 대상이 됐을지 모른다. 친구는 서울 코엑스에서 열렸던 N.EX.T 2집 첫 콘서트에 언니와 기차를 타고 갔다. 서울에 갔다온 뒤 “너무 좋아서 정신을 잃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라고 말했다.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신해철의 빈소에 조용필·김세황·서태지 등 선후배 동료 가수들은 물론 1만5천 명의 팬이 찾아 추모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신해철의 빈소에 조용필·김세황·서태지 등 선후배 동료 가수들은 물론 1만5천 명의 팬이 찾아 추모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1997년 9월30일이었다. 수능시험을 두 달 앞두고, 시장이 교체됐다. 그는 라디오 속 의 시장이었다. 나에게 신해철은 ‘밤의 대통령’이었다. 고2·고3 시절, 수능시험과 모의고사 성적, 야자, 여드름 따위에 생각을 저당 잡혔던 돌이켜보면 암울했던 시절. 신해철은 나에게 전람회를 소개해줬고, 나는 그 울림 깊은 목소리를 사랑했다. 내가 사랑한 이가 신해철은 아니었으나, 내 사랑을 인도해준 것은 그였다. 시장은 그런 나를 떠나며 “인생은 경쟁이다, 남을 밟고 기어올라라, 미래를 위해 현재를 반납해라, 이런 논리들이오. 우리는 분명 그걸 거절했습니다. 이곳은 우리들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도시고요. 현실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랑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확인한 이상 언젠가는 경쟁·지배 이런 게 아니라 남들에 대한 배려, 우리 자신에 대한 자신감 이런 걸로 가득한 도시가 분명히 현실로 나타날 거라고 믿어요”라는 말을 남겼다. 그 2년간 신해철은 고등학생인 나에게 ‘경쟁’, 지금 말로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라’고 직접화법으로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1998년 대학에 가자 동기 남자들은 툭하면 를 불렀다. 틈틈이 고백 비슷한 걸 한 친구는 같은 곡들을 삐삐에 넣어뒀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신해철을 멀리했다.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 이 낱말들을 난 아직 믿습니다, 영원히”를 직접 들으면 먹던 물을 ‘풋’ 뱉게 됐다. 그 단어들을 유치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음악과 그가 내 청소년기에 ‘경쟁을 거절하고 행복에 귀기울이라’고 말해준 사람임을 잊고 살았다. 몇 가지 이슈에 대한 그의 거침없고 적확한 말들만 기억했다. 잊고 살았는데 갑작스러운 비보를 접했다. 6년 만의 새 앨범 를 다시 듣고 그가 최근 출연했던 예능 프로그램들을 다시 보며, 신해철이라는 사람이 마흔일곱이 될 때까지 얼마나 한결같았는지, 그리고 여전히 소년성을 지키며 살고 있었는지 발견했다. 그는 지난 7월 <snl>(tvN)에 1시간 동안 출연하면서 소년처럼 낄낄대고 웃다가 ‘1분간의 진심’ 코너에서 말했다. “이곳에서 우리 아기들이 매일매일 아침마다 뽀뽀를 하고 있잖아. 이게 우리가 선택한 삶이고 우리가 선택한 최상의 행복이고, 아이들이 우리하고 매일매일 눈을 마주치고 있는 한 나머지 잡다한 건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 아이가 9살, 7살일 때 들려주는 이야기가 30살, 20살이 됐을 때 들려주는 이야기하고 같을 겁니다. 아프지만 마. 여러분, 아프지만 마세요.” 그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끝없이 남을 밟고 일어서는 것 대신, 아프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자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그가 믿는다고 말한 단어들을, 정말 끝까지 믿고 살았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s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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