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널 만나는 날 노란 세 송이 장미를 들고 룰루랄라 신촌을 거니는 내 마음은 마냥 이야에로.” 1996년 젊은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일기예보의 노래 의 한 소절이다. 1년 뒤인 1997년, 유희열이 가사를 쓰고 이승환이 노래한 에서도 서울 신촌은 중요한 공간이다. “신촌 구석진 선술집에 계란말이를 잘하시는 맘씨 좋으신 아주머니 생각만 해도 편안해져.”
90년대 ‘대학문화’ 속에서 성장한1990년대 신촌은 젊은이들이 첫 데이트를 하고, 친구를 만나고 술 마시며 기쁨과 고뇌를 나누던 곳이었다. 지방 중소도시 여고생들은 서울대가 아니라 ‘신촌에 있는 대학’을 가는 게 꿈이기도 했다. 문화평론가 정윤수씨는 한 주간지 칼럼에 썼다. “신촌은 90년대가 전성기였다. (중략) 그때, ‘대학문화’가 형성되면서 신촌도 크게 부상했다. 당대를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신촌이 있어서 고집스런 음악문화가 형성되었고, 신촌블루스와 진짜 록카페가 존립할 수 있었다. (중략) 그러나 신촌은 90년대 이후 혼잡하고 개성 없고 교통체증만 극심한 거리로 전락했다.”( 제1065호)
문화평론가만의 해석은 아니다. 10월19일 서울 신촌 거리에서 만난 강은영(29·대학원생)씨는 “신촌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신없고 사람이 많을 뿐만 아니라 음식점들은 다 규격화·대형화돼 먹고 싶은 곳도 쉬고 싶은 카페도 없다”고 말했다. 대학생 강재영(25)씨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고등학생 때 고도로 산업화·고도화된 신촌에 발을 끊었다. 당시의 신촌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돼 있다. 장사도 안 돼서 상인들이 죽는소리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안무가 손효진씨는 “정말 어중간한 곳 같다. 사람이 확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고 명동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애매하다”고 말했다.
그런 신촌이 변화를 꾀하고 있다. 10월19일 오후 4시, 신촌 현대백화점 유플렉스 앞 광장. 최한결(10)양이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최양이 자전거 페달을 굴리자 앞에 놓인 믹서기 안에 들어 있던 귤이 신나게 갈렸다. 자신의 운동에너지로 발전해서 만든 ‘친환경 전기’로 갈아만든 생과일 귤주스를 마시며 한결양은 “꿀맛”이라고 했다.
이곳은 ‘전환장터’. 전환장터에선 송전탑 반대 투쟁에 이어 ‘원전 반대 생태마을’로 거듭나고 있는 경남 밀양에서 올라온 감말랭이, 생밤 등이 팔리고 있었다. 경기도 화성시 산안마을에서 올라온 달걀은 태양열 오븐에서 토스트에 올라갈 프라이로 조리됐다. 전환장터는 전기에너지 대신 사람에너지와 태양열에너지로 음식이 만들어지는 ‘에너지 자립’이 도심 한가운데인 신촌에서도 가능하다는 작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차 없는 거리’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전환장터 바로 앞에서는 ‘파인드 더 스팟’이라는 하드코어 밴드가 다소 ‘센’ 공연을 하고 있었다. 거리 공연장 앞에서 청년들의 자립공간 ‘오늘공작소’는 PVC파이프로 의자를 만드는 워크숍을 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짧게는 10분, 길게는 30분이면 의자 하나를 뚝딱 만들 수 있었고, ‘원전 하나 줄이기 캠페인’ 성격을 띤 사진전도 열렸다. 연세대 생활협동조합은 천연 수제비누를 만드는 간단한 워크숍을 진행했고 청년 녹색당원들은 못 쓰는 잡지 등을 오려붙여 ‘녹색에 공감하는 청년들이 상상하는 새로운 도시’를 표현한 콜라주 작품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학교의 전력 사용량을 28% 절약한 서울 마포구 숭문중학교 학생들이 지구를 위한 편지를 함께 쓰고 에너지 절약 서명을 하는 공간도 있었다.
이 모든 장면은 신촌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이 모인 ‘전환도시-신촌’팀이 기획한 ‘해킹더시티 페스티벌’이 만들어냈다. 신촌에 삶터·일터·공부터를 둔 김준한, 스미스(활동명), 이태영, 안정배, 정현희 5명이 주축이 돼 기획하고 공모를 통해 모집한 다양한 예술가·활동가 참여그룹들과 함께 진행한 축제다.
이들은 왜 이런 축제를 기획했을까. 시작은 올해 1월 신촌로터리에서 연세대 정문 앞에 이르는 550m 직선도로가 대중교통전용지구로 조성되고, 토요일 오후 2시~일요일 밤 10시에 ‘차 없는 거리’로 운영되면서부터다.
이태영씨는 “신촌 연세로 왕복 4차선 도로가 2차로로 좁아지고, 보도가 8m가량 넓어졌다. 한전 분전함 같은 보행을 방해하는 시설물이 철거됐고 벤치가 많아졌다. 광장이 만들어졌고, 자동차 소음이 가득 찼던 곳을 사람들이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각종 행사가 앞다퉈 열리면서 거리에 생기가 돌았다. 하드웨어가 바뀌긴 했는데 주말마다 열리는 다양한 축제만으로는 부족함이 느껴졌다. 차 없는 거리가 되는 신촌이 어떤 공간이 돼야 할까, 그 속에 어떻게 사람이 자리할 수 있을까 고민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전환도시-신촌’팀은 지난해 11월 청년 문화예술인들이 신촌 문화를 재생해보자고 발족한 ‘신촌재생포럼’에서 출발했다. 신촌을 어떤 공간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고민과 ‘차 없는 거리’라는 신촌의 환경 변화가 결합하면서 ‘전환’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다.
안정배씨는 “휘발유를 사용하는 자동차가 없어진다는 것은 환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슈다. 2000년에 네덜란드에서 처음 제기되고 영국의 토트네스에서 실천되고 있는 개념이 ‘전환’이다. 석유 가격 급상승, 상업자본의 들이닥침 같은 외적 요인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지역의 에너지 자립을 이루는 것이다. 토트네스의 전환을 참고하되,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전환을 다시 고민하는 프로젝트가 ‘전환도시-신촌’이다”라고 말했다.
‘전환도시-신촌’팀은 4월에 꾸려져 세미나, 워크숍, 전문가 특강을 진행했다. 9월24일엔 신촌 홍익문고 앞에서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 북콘서트를 열었고, 신촌의 술집 쉬바펍에서 사진전도 열고 있다. 10월18일엔 캐나다·일본 등 외국 예술가들이 참가한 ‘자립의 기예’라는 포럼을 열었고 10월19일 축제가 끝난 뒤에도 쉬바펍을 ‘공유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공유공간 프로젝트는 정현희·정근혜씨 등 연세대생 6명과 쉬바펍 사장이 낮 동안 비어 있는 공간을 사람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공유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다. 근처 하숙생들의 집밥 네트워크 등 콘텐츠를 고민 중이다. 안정배씨는 “신촌 차 없는 거리에 커다란 벤치 혹은 나무 조형물 등을 설치하고 태양광으로 발전한 전기로 휴대전화를 충전할 수 있는 ‘거대한 충전소’를 만들어 누구나 사용할 수 있고 그곳에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동생활스팟’ 등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이웃’으로이들의 고민은 ‘에너지 자립(전환)’과 ‘공동체’를 결합해 신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연결성을 갖고 이야기와 삶을 공유할 수 있는 ‘흐르는 사람들을 위한 도심 마을’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전환도시-신촌’팀의 이태영씨는 ‘신촌 사람’이다. 신촌에서 대학을 다녔고, 졸업한 뒤에는 신촌 지역 공동체 복원을 위한 풀뿌리 회의체 ‘신촌민회’에서 활동하면서 동네 카페 ‘체화당’ 운영에도 참여하고 있다. 지난 지방선거에 서대문구의원 녹색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30살 이태영씨는 20살에 대학에 입학한 뒤 10년 동안 신촌에 살면서 특별히 신촌 ‘주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구의원 선거 준비를 하면서 이 지역만이 갖는 독특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도시에서는 자기 집이 없는 한 2년 전세 계약이 끝나면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 2년 뒤 떠나더라도 현재는 그곳의 주민이고, 살지 않지만 그곳에 학교와 직장이 있는 사람들도 그 지역의 주민이다. 구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흘러다니는 사람들도 행복하고 안전한 마을’을 만들어보자 생각했고, 신촌의 ‘재지역화’를 고민하는 지금도 흘러다니는 사람들을 위한 마을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
역시 신촌에서 대학을 다녔고 졸업 뒤에는 주로 홍익대 앞에서 공연을 하고 두리반 투쟁에 깊숙이 참여한 안정배씨는 “서른을 넘기면서 이제 나도 동네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동네는 다른 동네다. “마을 만들기가 만날 이웃, 이웃 하는데, 주로 주택지 마을에서 옆집 사람을 일컫는다. 30대 초·중반인 내 또래는 내 집이 없으니 주택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럼 나는 이웃이 없는 사람들인가. 우리 또래에게는 단골 가게, 좋아하는 뮤지션이 이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촌’을 동네로 그리고 마을로 만들어가자는 게 ‘전환도시-신촌’의 뜻이다.”
그런 만큼 이들이 생각하는 마을에는 ‘다양성’이 중요하다. 다양한 사람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 ‘전환도시-신촌: 해킹더시티’ 페스티벌에서 듣기 난해한 하드코어·패스트코어 밴드들이 대거 공연한 이유도 그래서다. “문화적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신촌이면 좋지 않겠나.”(안정배)
이런 시도는 일단 벽에 부딪혔다. 공연이 진행되는 낮 시간 동안 주변 상인과 행인들의 “시끄럽다”는 민원이 이어졌다. 저녁 8시20분. 마무리 프로그램으로 공연했던 팀들이 함께 연세로를 행진하는 ‘연세로 순례’ 역시 ‘시끄럽다’는 이유로 예정된 마무리 지점(신촌로터리)까지 가지 못했다. 마무리 행진에 참여한 음악가 단편선은 “행진의 출발점이 현재라면 행진의 도착점을 미래로 정하고 현재에서 지속 가능한 미래로 전환하자는 의지를 담았다. 가로막혀서 씁쓸하긴 하지만, 새로운 예술에 대한 논의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 자체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을 자체가 이미 정치다”벽에 부딪힌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정치 행위. 애초 워크그룹으로 참여하려던 녹색당은 서대문구가 내부적으로 정한 ‘정치 행위 금지’ 규정에 따라 참여하지 못하게 됐다. 녹색당은 대신 이름을 ‘영 그린’(young greens)으로 바꿔 메인 광장 뒤쪽에 조그만 부스를 만들어 옹색하게 참가했다. 전형우 녹색당 운영위원은 “마을 자체가 이미 정치다. 사람이 모여 있으면 그건 이미 정치다. 누군가의 당선이 아니라 ‘녹색’이라는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도 막는다는 건 정치 행위를 너무 경직되게 해석하면서 마을 자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고 비판했다.
에너지 자립, 문화적 다양성, 커뮤니티. ‘전환도시-신촌’팀은 신촌 지역에 이 세 가지를 채워넣으려고 지금도 다양한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실험하는 중이다. 흐르는 사람들의 신촌 마을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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