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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깎다 피가 뚝뚝, 그래도 좋았던 이유

<연두색호박국> 태풍에 떨어진 푸르뎅뎅한 호박으로 끓이는 1년에 한 번 먹는 별미
등록 2014-10-03 14:40 수정 2020-05-03 04:27
가을 하늘 아래 호박이 무겁게 영글어가고 있다.

가을 하늘 아래 호박이 무겁게 영글어가고 있다.

우리 집은 봄이면 울타리 주변이나 밭둑 나무 밑에 호박을 많이 심습니다. 호박 덩굴은 어디든지 높이 올라가 주렁주렁 열매를 맺습니다. 여름내 호박볶음·된장찌개·호박잎쌈 등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어 먹고, 그대로 키워 늙은 호박도 만들고, 호박 고자리도 만들어 겨울부터 봄까지 먹습니다. 호박은 1년 양식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고마운 열매입니다.

너무 많이 열려서 미처 못 따먹고, 너무 높이 올라가 열려 못 따먹고, 보이지 않게 숨어 열어 못 따먹고, 울타리 위 안전한 곳에 열린 잘생긴 호박은 익히려 안 따먹고 하다보면, 가을이면 늙은 호박을 한 더미 따게 됩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호박이 많이 열려도 호박 고자리를 만드느라고 호박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날씨 좋은 날은 매일 호박 덩굴을 뒤져 호박을 따들여 얇고 동글동글하게 썰어 강가 바위나 넓은 돌 위에 널어 말립니다. 시기를 놓쳐 조금 크고 씨가 생긴 호박은 반을 갈라 씨를 파내고 반달 모양으로 썰어 말립니다. 얇게 썬 호박을 뒤집지 않고 3~4일 말리면 깨끗하고 맛있는 호박 고자리가 됩니다. 호박 고자리를 말릴 때 비가 오면 거둬들였다 다시 널거나 뒤집어주면 예쁜 호박 고자리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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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호박은 가을이 오기 전 태풍과 사나운 비바람의 심판을 견뎌야 합니다. 나뭇가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자라던 호박은 안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다 떨어집니다. 울타리 속속들이 바람이 불어 익기도 전에 떨어진 푸르뎅뎅하고 누르스름한 호박이 많이 있습니다.

호박이 많이 떨어진 새벽, 온 가족은 춥고 을씨년스럽지만 옷을 흠뻑 적시며 호박을 주워들입니다. 긴 막대기를 들고 곡식 포기를 들춰 밑에 숨은 호박도 찾아내고, 언덕 아래로 굴러 풀밭에 숨은 호박도 찾아내 알뜰히 거둬들입니다.

잘게 쪼개 돼지도 먹이고 소도 먹입니다. 큼직하게 툭툭 잘라 돼지죽도 끓여 먹입니다. 소는 뜨거운 호박을 먹으면 이가 빠진다고 하여 쇠죽에 섞어 끓이지 않고 큼직하게 잘라 따로 삶아 식혀서 먹입니다.

온 가족이 호박을 줍는 동안 어머니는 호박국을 끓이느라고 바쁩니다. 덜 익은 호박국을 끓이자면 준비할 일이 많습니다. 들깨를 맷돌에 갈아 체에 걸러 들깨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덜 익었지만 잘생기고 맛있게 생긴 호박을 여러 개 골라 우선 반을 쪼개 속을 파내고 또다시 작은 조각을 내어 깎습니다. 어머니를 도와 호박을 깎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큰 칼로 호박 조각을 쥐고 안으로 길게 깎습니다. 나는 손힘이 약하니 작은 칼로 안에서 바깥으로 내뻗어 깎으라고 하십니다. 자칫 힘 조절이 안 돼 손을 다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호박을 주우러 가고 싶어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어머니 눈치를 살피며 몰래 안으로 길게 들여 깎다가 칼이 쫙 밀리면서 칼날이 엄지손가락 중간에 들어갔습니다. 피가 뚝뚝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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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몰래 손가락을 감싸쥐고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다가 어머니한테 들켜버렸습니다. 그러잖아도 바쁜데 왜 말을 안 듣느냐고 손가락 마디를 베었으면 어찌할 뻔했느냐고 도움이 안 된다고 무지 많이 혼납니다.

단오날 매달아놓은 약쑥을 비벼 보드랍게 만들어 불을 붙여 피가 나는 자리를 지집니다. 무지 뜨겁습니다. 뜨겁다고 울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딱지가 않도록 바짝 지져야 덧나지 않는다고 할머니가 붙들어주고 어머니는 지집니다. 손가락이 나을 때까지 물을 만지지 말라고 하여 오빠들 틈에 끼어 호박을 주워들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어머니는 덜 익어 연두색이 나는 호박을 잘게 썰어 큰 솥에 넣고 물을 조금 부어 끓기 시작하면 들깨 국물을 넣고 은근히 끓입니다. 호박이 푹 물러 주걱으로 저으며 아주 부드러운 죽같이 되었을 때 마늘 찧어 넣고 소금 간을 하여, 어른들은 다진 매운 고추나 고춧가루를 타서 먹습니다.

연두색 호박국은 1년에 한 번 먹는 별미입니다. 호박을 주워들이느라 춥던 차에 뜨끈뜨끈한 호박국에 밥 말아 한 그릇을 먹으면 속이 확 풀리고 추위가 놓입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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