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겨울,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옛 남친에 대한 잔상, 절친의 결혼 등으로 육체·감정노동하다 허기진 하루를 따뜻한 음식 한 그릇 만들어 먹으며 마무리하던 한 싱글녀가 우리를 찾아왔다. 이름하여 (이하 ). 그녀는 유튜브·포털사이트를 통해 10분이면 한 편, 1시간이면 전편을 완주할 수 있는 ‘문턱 낮은’ 웹드라마라는 형식을 타고 왔다. 이 작품을 총괄·기획한 윤성호 감독은 “ 제갈재영은 겉으로는 허기져 보이지만 속은 단단한 사람”이라고 했다.
윤 감독은 8월25일 박현진·백승빈·전효정 3명의 감독과 함께 또 다른 웹드라마 (이하 )를 만들어 공개했다. 1화와 5화는 윤 감독이 연출하고 세 감독이 2·3·4화를 각각 연출했다. 의 주인공 천우희는 잘나가는 준 셀렙이다. 패션잡지 의 스타 기자로, 여러 남자와 밀당 중이다. 그 과정에서 계속 자빠진다. 백승빈 감독은 “천우희는 겉으로는 인간관계·경력 등 모두 풀(full)해 보이지만 속은 공허함이 큰 여자”라고 설명했다.
네 감독을 작품이 공개된 8월25일 만났다. 공개 나흘 만에 은 40만 건이 넘는 클릭 수를 기록했다. 30대 중·후반 싱글남녀 4명은 ‘출중한 여자’ 천우희라는 앵글을 통해 이 시대 싱글로 연애하는 법, 그리고 사는 법을 솔직·담백·유쾌하게 쏟아냈다.
일반인과 셀렙 사이, 싱글의 자화상
- 네 사람이 함께 작업하게 된 계기는.
윤성호(이하 윤): 내가 여기저기 발을 걸치고 살다보니 각각 다른 경로로 알게 됐다. 전효정 감독은 지난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졸업생 중 가장 출중한 각본 실력을 갖고 있다. 칙릿을 잘 쓸 것 같았는데 정말 빠른 시간 안에 써내더라. 을 연출한 박현진 감독은 때 같이 작업하면서 캐릭터 구축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싱글 라이프에 관해선 백과사전 수준이다. 를 연출한 백승빈 감독은 오래 알고 지냈는데 황야의 고수다. 봉준호 감독이 가장 아끼는 한국영화아카데미 후배다. 아끼는 후배가 여럿인 걸로 알고 있다. (일동 웃음) 문학적 감수성이 매우 높다. 네 분 다 잘할 것 같아서 요청했고, 지금은 세 분이 더 친할 거다.
- 모두 싱글 이야기다. 싱글을 계속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나.
박현진(이하 박): 지금도 그렇지만 때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혼자 먹는 걸 찍어 올리는 사람들에 주목했다.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소비 규모는 작아지고 혼자 누리는 게 많아졌다. 단출한 공간에서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싱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윤: 때도 그랬지만 지금 우리도 다 싱글이다. 이런 점도 있다. 요즘은 모두가 살면서 5분쯤은 셀렙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세상이다. 오디션 프로그램도 많고, 기자들도 TV에 출연하다 허지웅씨처럼 스타가 되기도 한다. 에선 그런 모습을 담았다. 를 연상시키는 에 천우희의 썸남 안재홍이 출연하고, 또 다른 썸남 래퍼 이주승은 를 본뜬 으로 뜬 설정이다. 고독한 먹방이 자화상인 것처럼, 일반인과 셀렙 사이를 줄타기하는 모습 역시 싱글의 자화상인 것 같다.
- 우희의 썸남들을 보고 있자면 에는 인류 보편의 찌질남이 두루 등장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래, 모든 지나간 연애의 상대는 찌질하지’ 생각하면서 위안도 됐다.
전효정(이하 전): 어? 아닌데. 천우희의 구남친으로 등장하는 웹툰작가 조천관은 찌질남이 아니다. 그저 헤어진 남친은 모두 찌질이라고 우리가 기억하는 것일 뿐. 천관이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옛 여친 우희에게 미련이 남은 듯 대하지 않고 냉정하게 자르는 건 전혀 찌질하지 않다. 다만 우희와 우희의 친구 우정의 입에서 나오는 그의 별명이 ‘찌질이’일 뿐이다.
윤: 1화에서 안재홍도 찌질하지 않다. 재홍을 통해 절친들이 고백할 때 쓰는 무리수를 안 쓰는 남자를 보여주려 했다. 만약 재홍이 얄쌍한 8등신 모델이었다면 나중에 찌질함을 보여주는 반전이 강하겠지만, 안재홍이라는 배우는 아직 대중에게 익숙지 않은 풍채의 연기자니까 이런 풍모를 가진 사람도 스위트하게, 로맨틱하게 고백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 재홍은 남자가 “한 걸음씩 다가가겠다”더니 나중에 홀랑 가버리잖나.
박: 역으로 생각하면 우희가 다가올 또 다른 기회를 기다리면서 재홍을 밀어냈다. 여자한테 계속 매달리는 남자가 더 찌질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래퍼 이주승은 허세가 좀 있는데, 왜 보통 사람들 누구나 그렇지 않나. 일할 때는 생각도 깊고 창의적인데 막상 여자한테 작업 걸 때나 술자리에서 허투루 일장 연설할 때 보면 특히 그렇다. 나도 그랬다. 유명하지도 않을 때 ‘나중에 유명해진 뒤 옛 남친이 내 기사에 댓글 달면 어떡하지’ 뭐 이런 망상을 했다.
윤: 나쁜 건 아니고 사람은 다 경박한 거지. 그래서 난 꾸준히 일관성 있게 경박하려고 하는 거다. 멋있는 척 안 하고.
박: 이상하게 홍대에서 활동하는데 얼굴이 조금만 괜찮으면 여자들이 줄을 선다. 특이해.
백승빈(이하 백): 음악하는 친구를 만난 내가 알던 여성은 엄청난 고가의 기타도 막 바꿔주더라. 놀랐다.
박: 근데 전혀 그런 생각 안 했는데 사람들이 ‘웃프다’며 ‘너무 수난극’이라고 해서 살짝 당황했다.
윤: 이게 모두가 한 번씩 우희를 자빠지게 하니까, 우리는 한 번인데 우희는 네 번 자빠지니까 보는 사람 입장에선 ‘수난극’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나중에 이 작품이 소위 ‘된장녀 혼내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을까, 남자 감독이 된장녀 머리 쥐어박으면서 끝나는 느낌을 주는 건 아닐까 걱정되더라. ‘누가 누구한테 된장질하지마라’ 같은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표현이고 이런들 어떠하리, 그런들 어떠하리 살아야 하는 건데, 내가 뭐라고. 그래서 마지막에 두 여성 감독님들과 상의해서 엔딩을 바꿨다.
전·백: 바뀐 엔딩 너무 좋다. 달밤에 춤추는 장면인데, 정말 마무리를 잘한 것 같다.
찌질했던 연애의 기억
- ‘찌질남’ 이야기를 하다보니 감독님들의 찌질했던 연애의 기억, 부끄러운 연애의 기억이 궁금하다.
백: 연애한 지가 몇 년 돼서….
윤: 마지막 연애한 게 언젠지 구체적으로 말해야지.
전: 베이킹 수업한 게 마지막 아닌가.
백: 만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뭐 만드는 걸 좋아해서 같이 다녔다.
전: 근데 수업 끝나고 헤어졌단다. 우리가 만들면서 수다를 좀 떨어서 잘 안다.
윤: 진짜 사귄 거 맞나? 반죽만 같이 한 세 번 한 거 아닌가. 내 기준에 그건 데이트도 아니다. 백승빈 감독은 영화·문학과 결혼했다. 보통 백 감독 같은 사람을 여성들이 진국이라 하는데, 연애도 많이 안 해보고 순수하고. 근데 이건 여성들의 판타지다. 백 감독은 인간관계에서 진국은 아니고 자기 취향과 업무에서 진국인 스타일이다.
- 다른 분은 부끄러운 연애사 없나.
전: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를 3년 동안 짝사랑했다. 근데 마치 3년 동안 연애한 기분.
박: 아, 부끄럽다.
윤: 그건 증세다. 병이다, 병.
- 서로의 편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면?
윤: 백승빈 감독 편인 ‘기상이변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편에서 우희가 전화를 하면서, 점점 온도가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이게 대본으로 쓰면 재밌어도 막상 찍으면 쑥스러울 수 있는데 잘 표현했더라. 그리고 우희의 블랙드레스. 나는 반대했다. 아무리 생일파티라고 해도 집에서 검정드레스 차려입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진짜 괜찮더라. 이런거 보면 백감독이 나보다 여자에 대해서 더 잘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박현진 감독편인 ‘스캔들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편은 차 안에서 러닝타임 절반이 지나가기 때문에 자칫 밋밋할 수 있는데 감독님이 이주승과 천우희 두 배우의 조합만으로 전혀 밋밋하지 않게 잘 찍으셔서 놀랐다. 게다가 이주승이 너무 능청스럽게 연기를 잘하더라. 이주승이 연기를 잘 하는 배우이긴 한데, 이런 연기도 할 줄 몰랐다. 전효정 감독 편인 ‘구남친을 추억하는 우리의 자세’편에서 우희가 처음에 막 옷을 벗는 장면이 있다. 보통 남자 감독들이 여성의 민낯을 드러내는 수법은 뻔하다. 혼자 비빔밥을 퍼먹는다거나. 그런데 전 감독님이 너무 잘 표현했다. 인상깊었다.
전: 백승빈 감독 편에서 “나 적금도 있고 새로 장만한 이 집도 마음에 들고…” 나레이션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때 “사실 서른살에 내 꿈은 남자친구와 세계일주 하는 것이었다”라는 나래이션이 있는데, 이때 백 감독님이 음악을 깔면서 세계지도를 쫙 보여주는데 이게 너무 좋았다. 이 에피소드가 어쩌면 여성들의 공감을 가장 많이 얻지 않을까 생각했다.
박: 전 윤성호 감독이 연출한 5화 ‘모퉁이를 돌 때 우리의 자세’에서 달밤에 우희가 춤추는 엔딩이 좋았다. 애초 시나리오에는 없었다. 마지막을 맺는 게 고민이 됐을텐데 마침 그날 슈퍼문이 떠서 슈퍼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으셨는지 여튼 마무리가 잘 됐다. 전감독님 편에서 우희가 풀샷에서 쫙 미끄러지는 장면을 비롯해 그 편에서 등장하는 슬랩스틱도 좋았다.
백: 저도 전 감독님 편에서 우희가 처음에 옷 벗어던질 때, 천우희라는 여배우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됐다. 윤성호 감독의 경우 개인적으로 늘 궁금했던 게 있다. 박혁권·박희본 같은 윤성호와 합을 맞춰온 배우들 말고 새로운 배우가 와서 윤성호의 대사를 쏟아내면 어떻게 될까, 무너질까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을까 늘 궁금했는데 천우희가 무너지지 않더라. 그건 천우희의 힘이기도 하고 윤성호의 힘이기도 할 것 같다. 윤성호와 천우희의 모습을 보면서 1977년 을 함께 찍은 우디앨런과 메릴스트립의 스틸사진이 생각났다. 그때 메릴스트립은 29살이었다. 29살의 메릴 스트립이 우디 앨런을 졸졸졸 쫓아다니면서 연기 지도받고 서로 상대역도 한다. 윤성호와 천우희는 이번 작품에서 딱 1977년의 우디앨런과 메릴스트립이었다.
규수 같은 싱글, 미련 없는 싱글…
- 천우희가 극중에서 29살이다. 29살에 여성들이 수난을 많이 당한다. 몇 년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기도 하고. 감독님들의 아홉수는 어땠나.
윤: 남자들이 서른쯤 되면 보이기 시작한다. 취업해서 3~4년 쭉 일하면 대학 졸업해서 갓 취직한 20대 중반 여성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그러면서 전에 사귀던 동갑 여친과 헤어지고, 그러면 여자는 전성기가 지난 느낌으로 괴로워한다. 내가 그런 건 아니고. 나는 20살 전에는 연애를 딱 한 번 해봤다.
박: 난 딱 29살에 헤어졌다. 당시 남친이랑 5년 넘게 사귀었는데, 이미 너무 친구 같은 사이가 돼 있었다. 이 사람과 사귀면서 서른이 되긴 싫어서 헤어졌고, 마침 그때 영화 연출부에 들어가게 돼서 바쁜 나머지 후유증도 없었다. 다만 훨씬 전에 헤어졌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관계를 1년여간 붙잡고 있었던 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백: 난 마지막 연애를 한 게 28살 때여서 29살의 연애 기억은 없다. 근데 기억나는 게 있다. 21살 때 여자친구랑 경주에 놀러갔다가 헤어졌다. 그때 빌려탄 자전거에 펑크가 났다. 바람을 넣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자전거포가 없었다. 사실 경주엔 자전거포가 굉장히 많은데. 그 전에 여러 가지 사건이 있긴 했다. 아무튼 그때 혼자 집으로 왔고, 헤어졌다.
박: 이게 문학청년들이 주로 그런데, 연애에서 시그널에 민감하다.
윤: 전형적으로 사건은 없는데 징후를 보고 행동한다. 백 감독은 미드·영드·소설 등 다양한 콘텐츠를 섭렵하고 있다. 인간은 스토리의 동물이다. 스토리를 소비하기도 하지만 생산도 해야 한다. 스토리를 생산하는 최고의 방법은 연애인데, 연애 안 하는 사람은 자체 스토리 생산이 가능하지 않으니 를 통해 연애 수요나 개인의 서사를 해결한다.
백: 전적으로 동의한다.
윤: 이 안에 다양한 종류의 싱글이 다 있다. 전 감독은 ‘중산층 가정’을 이루기 위한 단계를 마다하지 않는 일종의 규수감이고. 박 감독은 20대에 연애를 다 해본, 온갖 산전수전을 겪은 싱글이고. 주변에 돌싱도 많다.
박: 내가 도시 여성 괴담, 도시 돌싱 괴담을 많이 알고 있다.
윤: 백 감독은 개인 서사가 부족한 싱글이고 나는 내일모레 마흔인데 아직 마음의 정처를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 욕심내고 기웃대는 싱글이다. 그러면서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싶어 하는 못난 남자다.
박: 출중한 남자네. (일동 웃음)
- 연애는 다 하고 싶은가.
(일동) 물론이다.
박: 연애는 하고 싶은데 요즘 결혼, 자식에 대한 가능성이나 욕심이 별로 없어졌다. 어떻게 혼자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많아서 보험도 알아보게 되고. 얼마 전에 보험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 들고 있는 80살 지급 보험을 100살로 늘릴 생각은 없느냐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내가 80살까지 혼자인데 계속 건강하다면 정말 보험 지급 연한을 100살로 늘려야 하는 거 아닐까.
윤: 난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한다. 여자친구와 사귈 때 꼭 묻는 게 있는데 ‘죽을 때 와줄 거냐’는 거다.
박: 난 청소하기 싫을 때 ‘죽음’을 생각한다. 혼자 있다가 죽었는데 청소 안 해놨으면 구질구질하니까 청소하자.
윤: 난 외장하드를 청소한다.
힘들 때마다 “당 떨어진다”- 마음이 허기질 때 먹는 음식은 뭔가. 천우희는 힘들 때마다 “당 떨어진다”며 각종 디저트류를 달고 산다.
박: 우희 캐릭터에 끼니 대신 ‘허니버터 브레드’를 먹는 여성들을 참고했다. 화려하고 순간 당을 채워주긴 하지만 끼니는 아닌 걸 먹는 여성. 내 솔푸드는 평양냉면과 소주. 냉면은 1만원대 초반으로 기분을 낼 수 있는 외식이다.
윤: 나는 홍어삼합. 홍어가 맛도 맛이지만 혼자 먹기 힘들다. 초밥은 혼자 먹을 수 있는데 홍어를 혼자 먹는 건 다 먹지도 못하고 그림도 이상하다. 홍어를 같이 먹는다는 건 취향의 커뮤니티가 되면서, 우리는 끈끈하다는 걸 보여주는 연대의 의미가 있다. 팀이 만나면 꼭 홍어삼합을 먹는다.
전: 샤부샤부. 따뜻한 국물과 신선한 채소들. 삼시세끼 샤부샤부만 먹고 싶다.
백: 컵케이크. 거주지가 홍대·상수 쪽인데 새로운 케이크 가게가 생기면 꼭 간다. 12개들이 테이크아웃해서 집에 갖다놓고 먹는다. 얼려먹으면 또 맛있다. 노홍철이 초콜릿을 찾는 것과 같은 심리다.
- 싱글의 좋은 점은 뭔가.
박: 내가 되게 한심하거나 술 취했거나, 아무튼 지금 내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을 때 그럴 수 있다는 것. 내 마음대로 내 공간에 널브러져 있을 때도 좋다. 냉장고에서 물 꺼내서 콸콸 마시고. 그럴 때 혼자 사는 맛을 느낀다.
전: 밤에 훌쩍 나가서 맥주 한잔 마시기도 좋다. 연애의 가능성도 늘 열려 있다. 이런저런 세계를 탐험할 가능성도.
윤: 그렇긴 한데, 난 요즘 혼자 죽는 것,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백: 어릴 때 제시카 유의 다큐멘터리 를 보면서 혼자 죽는 것, 대신 작품을 남기는 것에 대한 판타지가 생겼다. 실화인데 헨리 다거라는 소설가가 나이 80살까지 브루클린의 허름한 옥탑방에서 병원 청소부로 일하며 혼자 살았다. 대신 밤마다 소설을 썼다. 그가 죽은 뒤 2만 장의 소설이 발견됐다. 그 작품이 너무나 대단했다.
윤: 유한한 삶이 영원을 획득하게 하는 게 예술이긴 한데 난 그런 것보다 그냥 살 맞대고 사는 게 좋다.
백: 나도 요즘은 그게 좋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 유아적 환상이었다. 내 단편영화 가 그런 예술의 이미지만 착취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요즘은 나도 살 붙이고 살면서 애도 낳아보고 싶다.
우리 집은 ‘기-승-전-결혼하라’- ‘결혼하라’는 가족의 압박은 없나. 이제 곧 추석인데 압박을 이겨내는 방법은 뭔가.
윤: 그게 가장 괴롭다. 우리 집은 ‘기-승-전-결혼하라’다. “어제 라디오 방송 들었다. 근데 라디오를 그렇게 잘하는데 왜 결혼을 안 해.” “어제 기사 봤다. 그렇게 잘생겼는데 왜 결혼을 안 해.” 예전에 여자친구가 생기면 보여드렸는데 이게 잘못인 것 같다. 자꾸 여자친구를 보여주니까 결혼하라고 더 성화하시는 것 같아서 요즘은 무조건 “사람 없다”고 한다. 없다는데 어쩌겠나.
박: 난 오히려 가족에게 말한다. “아, 결혼해야죠. 사람 좀 소개해주세요. 내일모레 마흔인데 나랑 만날 의향 있는 사람이면 소개해주세요.” 그러면 가족들이 “어, 너 내일모레 마흔이니? 야, 너도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이러면서 놀라며 떠민다. “야, 시골보다 서울에 사람이 많지 않니” 하고.
백: 그냥 의 마지막 장면처럼 “에라 모르겠다” 하고 춤이나 추는 건 어떨까.
전: 오, 그러면 가족들이 “큰일 났다. 쟤 괴롭히지 말자” 하겠다. (일동 웃음)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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