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전해들은 이야기다. 우리네 최고라는 명문대 총장을 지낸 존경받던 원로 학자가 백수(白壽)를 몇 해 앞두고 임종 때 손자와 나눈 대화다.
“할아버지, 일생 동안 행복하셨습니까?”
“그런대로 행복했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건강해야 하고, 어느 정도 먹고 살 것이 있어야 하고, 가족과 함께해야지.”
나는 “매화나무 물 줘라”라는 퇴계의 절명구가 “빛을, 좀더 빛을…”(Licht, mehr Licht)이라는 괴테의 그것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기에 전임 총장이 손자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아무런 에누리 없이 다가온다.
반쪽 시골생활 이야기에 다소 느닷없이 이런 일화를 꺼낸 게 아주 연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후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의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목에 임파선암으로 의심받을 만한 멍울이 잡혀 병원에 다녀오고 나니 어지러운 상념의 폭풍이 몰아쳤다. 폭풍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성의 동아줄을 한번 당겨볼 만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40대에 반 시골로 온 나처럼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탈도시 전원행은 50~60대 은퇴자의 선택이다. 그러나 지근거리의 의료 혜택, 각종 행정 서비스와 문화생활 등을 들어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구호를 거침없이 수용하는 은퇴자들에 비하면 실제로 이들이 감내해야 할 수고는 적지 않다. 살아보면 시골생활이란 것이 단지 도시생활의 편리함 부재만이 아니라 이에 ‘시골적’ 삶의 불편함이 더해진 것임을 곧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 세상만사 이치가 대개 그렇듯 드러난 외피와는 달리 항상 고통만, 혹은 항상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쾌락에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면, 불편함 속에서도 무언가 얻는 것이 있다. 이 명제가 바로 시골생활의 불편함을 (인내를 넘어) 즐기게 만드는 핵심 철칙이다.
장 보기 불편하니 가꾸어 먹게 되고, 학원을 못 보내니 스스로 공부해야 하고, 낙후된 지역에 사니 나의 행운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고, 일이 힘드니 주변 사람 도움 구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이런 역발상을 뭉뚱그려 생각해보니 그 핵심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시골에서는 잘만 구상하면 시장(혹은 돈)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띄우는 삶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혼자 살기 힘드니 주변과 더불어 살아갈 방도를 탐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조금만 남과 더불어 사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시골에서는 내가 내 삶을 지배하는 주인이 될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이렇게 저렇게 마음을 다독여 상념의 폭풍을 헤쳐나가니 걱정하지 말라는, 다 괜찮을 거라는 아내의 미소가 다시 다사롭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려고 왔더니 깊은 시름으로 새보다 섧게 울면서 오갈 이 없는 한밤을 어찌 지내나”라고 노래한 이 ‘나의 청산은 아내와 함께 아직 푸르구나’ 정도로 되새김질되는 그런 한밤이다.
강명구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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