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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소환의 의식 슈퍼마리오 대전

오늘날 SNS만큼이나 1970~80년대 청소년에게 큰 영향을 미친 비디오게임 ‘슈퍼마리오’…

캐릭터 끼워 파는 패스트푸드 세트메뉴에 열광하는 이들을 위한 변명
등록 2014-06-27 13:20 수정 2020-05-03 04:27
맥도날드 마리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맥도날드 마리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문화 소비의 한국적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열성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게 무엇이건, 얼마이건 상관없다. 대세가 되는 순간, 아니 대세라는 것을 믿을 만하다는 판단이(라고 쓰고 ‘알리바이’라고 읽어도 좋다) 서면 우리는 정말 열성적으로 집착한다. 내가 누구든, 얼마나 필요하든.

나도 지금 뛰어가야 하는 거 아냐?

1년에 한두 편씩 ‘1천만 관객 영화’가 나온다든지, 인구 대비 명품 소비가 가장 많다거나, 한국적 기후에 과하다 못해 거추장스럽기도 한 캐나다구스 같은 잠바가 ‘국민 잠바’로 떠오른다거나 하는 건 문화 소비가 열성적이라는 설명 이외의 문제의식으론 포착하기 힘든 기이한 집단성이다. 종종 특정 소비 행위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질수록 역설적이게도 소비가 함께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는 것 역시 논리 영역 밖의 판단이다. 한국 사회에서 어떤 문화 소비는 설명하기 전에 이미 ‘현상’이 되고, 생각에 앞서 즉자적인 ‘행동’부터 하곤 한다.

6월16일 맥도널드 매장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 매체의 제목을 빌리자면 ‘이 마리오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를 염원하는 이들은 ‘내가 곧 가질 것이 그 마리오가 맞느냐’를 서로에게 확인하며 굳건한 연대감을 다졌다. 냉정한 시선으로 고작 그 장난감과 새벽잠을 바꾸느냐고 묻는 건, ‘너의 식어버린 열정은 개나 줘버려’란 한마디로 다 방어할 수 있다. 그 흔하디흔한 프랜차이즈 매장 앞에 경건히 도열한 인파를 보며 설령 그 장난감에 몰입해 있지 않더라도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같은 시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맥도널드 어디 지점에 가면 그 ‘마리오’를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집단지성의 ‘협업’이 작렬했다. 중고품 거래 사이트에는 그 ‘마리오’를 살 수 있다면 ‘해피밀’ 세트 따위가 얼마이건 그 이상의 가치를 지불하겠노라는 부당거래 제안이 횡행했다. 그런 타임라인과 몇몇 게시물을 읽으며 ‘게슈탈트 붕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나도 지금 맥도널드로 뛰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저 흐름의 귀퉁이라도 붙잡고 있어야 당대의 ‘문화인’ 취급에 으쓱할 수 있는 건 아닐까. 결국, 갔다. 물론, 없었다.

닌텐도 게임을 하면서 자란 세대는 ‘놀이하는 어른’이 되었다. 이들이 최근 ‘슈퍼마리오 대전’을 주도했다. 한겨레 박미향

닌텐도 게임을 하면서 자란 세대는 ‘놀이하는 어른’이 되었다. 이들이 최근 ‘슈퍼마리오 대전’을 주도했다. 한겨레 박미향

슈퍼마리오. 1981년 일본 출생. 1985년 일본의 게임회사 닌텐도가 발매한 ‘슈퍼마리오 브러더스’가 전 지구적 현상이 되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음. 게임 역사상 가장 성공한 캐릭터이자 가장 유명한 캐릭터. 멜빵바지를 입고 있으며, 버섯왕국에서 꽃과 버섯을 먹으면 세지거나 커짐. 그러나 일설에 따르면 ‘브루클린에 사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도 알려짐. 초기 목수였으나, 이후 배관공으로 진로 수정. 같이 활동하는 동생 이름은 루이지.

이상이 대략적인 마리오의 스펙이다. 하지만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 인류에게 마리오의 존재감은 저 스펙에 대한 설명만으론 한참 부족한 감이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가정용 게임기의 급속한 대중화가 이뤄졌다. 화투를 만드는 회사이던 닌텐도는 그 대중화의 흐름을 선도하며 글로벌 기업이 됐다. 일본 가전사가 세계를 제패하기 시작한 시기였고, 덩달아 일본풍 ‘그림들’이 세계의 아이콘으로 등극할 채비를 하던 시기였다.

슈퍼마리오가 가져다준 생의 전율

슈퍼마리오는 닌텐도에서 출시한 게임기 ‘패미콤’의 대표 게임이었다. 국내에는 현대에서 출시했던 컴보이를 사면 기본 패키지로 제공됐다. 당시 국내 비디오게임 기기는 선도자였던 닌텐도의 패미콤을 선두로 현대의 컴보이, 삼성의 겜보이(이후 알라딘보이), 대우의 재믹스 등이 뒤를 쫓는 형국이었다. 슈퍼마리오는 이 가운데 패미콤과 컴보이에서만 할 수 있었다(혹시, 집에 재믹스가 있었는데 슈퍼마리오를 했었노라고 생각되면, 그건 집에서 한 것이 아니라 친구 혹은 사촌의 집에서 했던 것이다). 슈퍼마리오 시리즈는 이후 출시된 어드벤처 게임 장르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좋을 만큼 가장 모범적이며, 가장 호환성이 높으며, 가장 효과적인 원텍스트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군림하고 있다. 위키백과를 검색해보면 1985년 슈퍼마리오 출시 이후 그 시리즈의 변환 및 아류작으로 볼 수 있는 게임이 40여 종이다.

슈퍼마리오를 비롯한 비디오게임이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인류에게 끼친 영향은 지금 SNS가 ‘깨어 있는 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만큼이나 엄청난 것이었다. 누가 어떤 게임팩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교실 지형도가 출렁였고, 다시 어떤 게임을 몇 반의 아무개가 잘하느냐에 따라 학교의 서열을 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삼삼오오 모여 누군가의 집으로 게임을 하러 가는 길은 그 인류들이 이전 인류와는 다른 삶을 살겠노라고 걷던 행적이었고, 도무지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경이적인 기록(점수)을 경신할 때면 생의 전율과 감격은 주체할 수 없는 환호로 표출됐다. 그리고 그 자극은 거의 매일 이어졌다. 거기에 빠질 수만 있다면 일상은 총체적으로 그냥 정겨웠다.

3500원짜리 세트메뉴 미끼에 담긴 감흥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어른들은 그 다른 인류를, 그들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를 전혀 이해해주려 하지 않았다. ‘나가 놀아라’는 당시 가장 흔한 세대 갈등 언어였는데, 골목길을 씹어먹고 다녀도 부족할 혈기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게임기 앞에 모여 경건한 자세로 탄식과 환호를 반복하는 광경이 뭔가 부조리해 보였던 것은 분명하다.

게임 시간을 제한하고, 할 수 있는 날짜를 지정하고, 게임기를 장롱 깊이 넣어 문을 잠그는 등 상상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탄압하고 혀를 차보았지만, 그럼에도 비디오게임의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건 막을 수 없는 재미였고, 포기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전진만 할 수 있고 후진은 할 수 없던 슈퍼마리오의 그 우직한 행보처럼, 우리는 그 모든 제한에서 비약해 학교가 끝나면 다시 게임기 앞에 모여 앉았다. 그 집단적 결기는 어쩌면 지금 우리 세대가 처음 세상과 마주했던 열정의 순간이었는지 모르겠다.

6월16일 ‘2차 슈퍼마리오 대전’에 참전한 다수의 이들은 그렇게 슈퍼마리오를 시작점으로 하는 복잡한 게임의 세계를 건너 어른이 된 이들이다. 이들의 역사는 곧 게임이 대중문화에서 패권을 차지하는 정복사이며, 애니메이션의 현대사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현란한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세대, 그리고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 어른이 아닌 것 같은 어른에게 슈퍼마리오는 말하자면, 보편적 성장의 기억을 나누는 증거물이자, 내가 기꺼이 이것을 구매하며 향수에 빠져도 좋을 나이가 되었음을 주장하고픈 유물이기도 하다.

햄버거 세트에 곁들여 나눠준 슈퍼마리오 피겨를 ‘득템’하기 위해 맥도널드 매장 앞에 줄을 선 사람들. 새벽부터 매장 앞은 이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육대근 제공

햄버거 세트에 곁들여 나눠준 슈퍼마리오 피겨를 ‘득템’하기 위해 맥도널드 매장 앞에 줄을 선 사람들. 새벽부터 매장 앞은 이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육대근 제공

맥도널드는 벌써 수십 년째 세트메뉴에 장난감을 끼워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있다. 그 프로모션을 거쳐간 장난감의 종류는 수백 종에 달한다. 그 프로모션은 대체로 가장 저렴한 메뉴에 할당된다. 이번에 슈퍼마리오를 증정하는 메뉴 역시 단돈 3500원짜리 세트메뉴다. 가장 저렴하고 흔하디흔한 미끼를 던져 최대한 많은 사람이 그것을 물도록 하는 판매 전략이다. 하지만 종종 이 미끼의 가치는 거기에 지불해야 하는 돈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감흥을 제공한다. 문화 소비는 다른 것과 달리 가격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소구 지점이 있고, 그 소구 지점의 맥락은 세대의 문맥, 사회적 시선으로 들여다봐야 겨우 이해될 정도로 다층적인 경우가 제법 된다.

슈퍼마리오로 대변되는 그 문화적 지점들이 우리 세대의 상징이었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벌써 우리를 실패했다고 말하고, 어떤 수단을 동원한들 아버지 세대가 누렸을 영광과 성장을 재현할 수 없을 거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아직 시작도 못해본 것 같은데, 벌써 박탈됐다고 하니 공허한 노릇이다. 그러나 체감적으론 벌써 고개를 끄덕였으니 서글픈 노릇이다. 난데없이 도래한 권능의 슈퍼마리오와 그 슈퍼마리오를 향한 집결의 에너지에는 바로 이 서글픔이 깔려 있는 건 아닐까. 혼돈의 시대에 내버려진 이들이 3500원짜리 장난감을 통해 가장 영광스러웠던 열성적 기억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드는 의식을 치르는 것. 새롭게 만들 수 없는 세상의 질서 앞에서 가장 처음 들이밀었던 열정의 마음을 다시 꺼내드는 것 말이다.

더 이상 새로울 수 없는 세상의 질서 앞에서

어찌되었건, 슈퍼마리오에 열광했던, 슈퍼마리오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어른인 시대다.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검사로 유신헌법을 썼던 이가 다시 세상을 호령하는, 뭔가 노인의 시계는 거꾸로 가는 것만 같은 참극에 가까운 시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흐르고 있다.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적 자본의 거의 모두를 가장 먼저 향유했고, 집단적으로 그것에 가장 능숙한 세대들의 장난감이 한국 사회를 향해 누구까지 슈퍼마리오를 아느냐고 묻고 있다. 당신은 이 장난감 하나를 갖고 싶은 열정을 이해나 할 수 있겠나. 혹시, 벌써 늙어버린 것은 아닌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온전히 우리 세대의 것이었던 열정이 단돈 3500원이라면 그야말로 ‘해피’한 것이 아닌가.

김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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