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노예의 후손과 노예 주인의 후손이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 형제애를 나누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내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앨라배마 거리에서 흑인 아이와 백인 아이가 형제자매처럼 손을 맞잡고 지내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내겐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은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입니다.” 1963년 그날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꿈꾼 이상향은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이었다.
인류가 꿈꿔온 이상향의 이력은 저마다 다양하고도 길다. 도연명의 에 의하면 무릉 근처에 살던 어부가 길을 잃고서 산속의 작은 동굴을 지나 복숭아꽃 핀 마을에 들어서는데, 그곳에는 바깥세상의 어지러움과는 단절돼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비옥함과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이 핵심이다.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이곳 ‘무릉도원’을 보고 나서 안견으로 하여금 를 그리도록 한다. 허균은 에서 적서차별이 없고 탐관오리가 없는 나라 ‘율도국’을 꿈꾼다.
서양에는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는 ‘아틀란티스’섬의 전설이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아틀란티스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 불리는 지금의 지브롤터해협 뒤편 대서양 어디쯤에 있었다고 한다. 도시계획과 군사제도 등 풍요로움과 함께 질서정연함이 이 섬의 미덕으로 묘사된다. 토머스 모어는 에서 사유재산이 없고 왕이나 정부 없이 각자가 주인인 나라를 이상향으로 묘사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에서 전화기와 비행기, 잠수함 등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과학적 이상향을 그린다. 이탈리아 독립을 외치던 도미니크회 수도사 톰마소 캄파넬라는 에서 사회개혁과 불평등 해소에 초점을 맞춘 이상사회를 꿈꾼다.
반대로 디스토피아를 상상함으로써 경종을 울린 사람들도 있다. 조지 오웰은 에서 빅브러더가 감시하는 세상을 그렸고, 올더스 헉슬리는 에서 ‘소마’라는 약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세상을 그린다. 영화에도 숱한 디스토피아가 등장한다. 에서는 인조인간이 인간을 대체하고, 에서는 기계가 세상을 지배한다. 에는 미리 만들어둔 복제인간을 통해 자신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그들을 치료 재료로 희생시키는 무자비한 의료기술이 등장한다. 과학기술과 의술의 발달은 축복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품고 있다.
과연 의사가 꿈꾸는 이상향은 어떤 곳일까? 펜 듀보아의 이라는 동화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섬 이야기가 나온다. 섬에는 세 사람의 경찰관이 있는데, 이들이 얼마나 유능한지 아닌지 혹은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섬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부지런하므로 아무도 나쁜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섬에서는 한 번도 사건이나 범죄가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세 사람의 경찰관은 언제나 한가하다. 그렇게 평화롭던 어느 날 실력을 발휘할 사건이 하나 터진다. 누군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쳐놓은 그물을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경찰관들의 활약으로 사건은 멋지게 해결되고 그들은 훈장을 탄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 경찰관들이 있긴 해도 범죄가 없기 때문에 할 일이 없어 한가하게 빈둥거리는 나라, 여기에 이상향의 힌트가 있다.
“내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질병이 없어져 의사들이 있긴 해도 한가하게 빈둥거리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내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의사들이 숱한 검사와 약과 치료와 수술과 임상시험을 들이대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내겐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은 마음 놓고 숨 쉬고 마시고 먹을 수 있는 건강한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입니다.” 2014년 오늘 대한민국 어느 의사가 꿈꾸는 세상이다.
김현정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 전문의*‘김현정의 천변진료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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