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식물만 하나 사람도 광합성한다

모자·양산·선글라스·팔토시 등 무장하며 햇볕 두려워하는 한국 사람들
적정량 햇볕은 비타민D 생성, 뼈 건강, 숙면, 우울증, 진통 효능
등록 2013-09-05 13:52 수정 2020-05-03 04:27

미국 캘리포니아의 어느 정형외과 의사 집에 초대받아 일주일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인 이민 3세로 미국에서 나고 자라고 현지인과 결혼해 혼혈 아이들을 낳고 살고 있었다. 혈통은 순수 한국인이지만, 아쉽게도 한국어를 전혀 못한다. 오후가 되면 일찍 일을 마치고는 근처 해변으로 자주 산책을 나갔는데 그때마다 내가 챙 달린 모자며 선글라스에 스카프 등을 연신 챙기는 것을 보더니 한국인이 맞다며 깔깔 웃는다. 자신의 어머니도 늘 그러는 것을 보았다는 얘기를 한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은 왜 햇볕을 싫어하냐고 궁금해했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하면 좀더 진실에 근접한 대답이 될까?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짧은 북구 사람들은 해가 나면 우르르 야외에 나가 조금이라도 햇볕을 더 받으려고 일제히 드러눕는다. 이런 풍경은 서양의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문화권의 사람들은 피부가 검게 타는 것을 썩 반기지 않는다. 피부를 권력이라고까지 예찬하며 자외선을 피하려고 오늘도 전전긍긍하지 않는가?
모자·양산·선글라스·선크림 외에 요즘 또 한 가지 새로 등장한 풍경은 팔토시다. 얼마 전 택배를 받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온 듯한 중년 남자가 팔토시를 끼고 있었다. 카페에는 팔토시를 낀 아줌마들이 단체로 앉아 즐거운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다. 등산 좋아하는 우리 병원 젊은 남자 직원도 산에 갈 때 요즘 팔토시를 끼고 다닌단다. 햇볕에 타는 것도 막아주고 의외로 시원하다는데, 내 관념 속 토시란 예전 여중 시절에 하얀 춘추복 소매가 더러워질까봐 끼던, 집에서 쓰다 남은 헝겊으로 엄마가 만들어준, 그런 토시다. 요즘 유행하는 팔토시와는 물론 모양도 쓰임새도 다르다.
사실 햇볕이 달갑지 않은 것을 불러오기도 한다. 피부 노화, 기미, 검버섯, 주름살 등 미용상 불청객뿐 아니라, 의학적으로는 때로 흑색종(Melanoma)이라는 피부종양을 일으키기도 한다. 흑색종은 백인종에게 상위 랭킹 암 중 하나인데 그들은 멜라닌 색소가 턱없이 부족해서 자외선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어느 뉴요커는 자외선 차단제를 열심히 발랐는데도 안 바른 한 곳 때문에 흑색종에 걸려 죽었단다. 그곳은 발바닥인데 왜냐하면 매일 옥상정원에서 물구나무서기 요가를 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황인종은 다르다. 적정량의 멜라닌을 지니고 있어서 피부암은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반면 적절한 햇볕은 우리 건강에 많은 도움을 준다. 우선 자외선은 피부에서 비타민D를 생성하는 역할을 하고, 비타민D는 미네랄의 흡수를 도와 뼈를 튼튼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햇볕을 잘 쬐지 못하면 골다공증에 걸리기 쉽다. 즉, 광합성은 식물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도 한다.
또한 햇볕은 우리가 잠을 잘 자도록 해준다. 잠과 관련된 호르몬 중에는 뇌의 송과선에서 분비되는 멜라토닌이라는 호르몬이 있다. 아침에 햇볕을 쬐면 멜라토닌은 분비를 멈추는데 그로써 사람은 잠에서 깨어나게 되고 그러고는 일정 시간이 지나야만 멜라토닌이 다시 분비돼 사람을 잠들게 한다. 즉, 아침에 햇빛을 봐야 밤이 되면 순조롭게 잠들 수 있다는 뜻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햇볕이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날리는 데 특효라는 것이다. 불안감을 해소하고 즐거움을 북돋고 용기를 주는 놀라운 정서적 기능이 있다. 울적할 때 밖에 나가 햇볕을 쬐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기분이 좋아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햇빛 찬란한 열대지방이나 지중해 등지에는 우울증 환자가 별로 없다고 한다.
햇빛에는 진통 효과도 있어서 통증을 앓는 환자들이 햇볕을 쬐면 진통제 사용량을 줄일 수 있다. 점심을 먹고 난 환자들이 휠체어를 끌고 나와 병원 정원에 나란히 늘어서서 햇볕을 쬐는 모습은 바람직하다.
햇볕이 두려워 창문마다 블라인드를 치고 좀비처럼 숨어 지내지는 않는가? 하긴 영화 속 뱀파이어는 햇빛을 받으면 재가 되어 사라지더라. 물론 지나쳐서 좋을 리는 없다. 햇볕이 좋다고 직사광선 아래서 화상을 입거나 열사병으로 쓰러지진 마시라.

김현정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