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방송됐던 드라마 에는 인상 깊은 장면이 하나 나온다. 여주인공은 패션모델로서의 바른 자세를 익히기 위해 눈물을 흘려가며 하루에 몇 시간씩 몸을 벽에 똑바로 붙이고 서서 버티는 고된 연습을 한다. 이런 자세훈련은 모델에게만 요긴한 것은 아니다.
등이 기역자로 굽은 꼬부랑 할머니 한 분이 양손에 각각 등산 스틱을 지팡이 삼아 짚고는 성큼성큼 진료실로 들어섰다. 등을 잔뜩 구부린 채 등산 스틱을 높이 쥐고 선 모습은 마치 스키 선수가 산꼭대기에 서서 이제 막 활강을 시작하려고 코스를 노려보는 광경을 연상케 했다. 형형한 눈빛, 당찬 목소리, 할머니에게선 만만찮은 여장부의 기상이 느껴졌다.
엑스레이 영상을 모니터에 띄워보니, 척추 기둥의 변형이 상당히 진행돼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변형돼온 흔적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언제부터 이러셨어요?” 할머니는 40살 무렵부터 등이 굽기 시작했다고 한다. 차트를 내려다보니 연세가 만 73살, 할머니는 20살에 시집을 갔는데 아궁이가 낮고 깊은 전통 한옥이었다고 한다. 시어머니의 식성이 까다로워서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매일 다섯 끼의 밥상을 따로 차려냈다고 한다. 그렇게 30여 년간 점점 등이 굽어갔다고.
“이쪽으로 오셔서 벽에 등과 허리를 대고 최대한 펼 수 있는 데까지 한번 펴보시겠어요?” 바른 자세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는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번 몸으로 체득하게 하는 것이 확실하다. 기력이 좋아 보여 웬만큼 할 것이라 예상은 했으나 상상 이상이었다. 할머니는 벽 앞에 서더니 단박에 번쩍 허리를 펴서 올렸다. 등이 벽에 거의 닿을 만큼이나 펴졌다. “근력이 참 좋으세요.” 할머니 눈에는 ‘내가 이 정도는 되지’ 하는 자부심이 반짝였다. 바른 자세의 비밀은 ‘근력’이다. 엑스레이에 나타난 골격이 아무리 부실하더라도 둘러싼 근육이 알차다면 그 부실한 골격을 번쩍 일으켜세워 훌륭하게 지탱해낸다.
2002년 초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는 운동치료실을 둘러보다가 호기심이 솟구쳐 질문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한 치료사가 질문에 대답하다 말고는 내게 치료실 마룻바닥에 누워보라고 했다. 나는 그대로 따랐다. 누운 상태에서 몸의 어느 부분이 바닥에 닿는지 잘 기억해두라고 했다. 일어나서 치료사가 지시하는 몇 가지 스트레칭 동작을 10분 정도 따라했다. 그리고 다시 바닥에 누웠을 때 이게 웬일인가? 바닥에 닿는 부분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처음에는 어깨가 분명 떠 있었는데 이제는 바닥에 밀착되고 있었다. 놀라는 나를 보고 이제 답이 되었느냐는 듯 치료사가 깔깔 웃었다.
자세 측면에서 볼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당함보다는 공손함이 몸에 배어 있다. 어려서부터 어른들 앞에 손을 모으고 몸을 굽히는 것이 습관이 돼 있다. 특히 여성들은 가슴을 펴서 내미는 자세를 몹시 어색해하고 불편해한다. 행여 되바라졌다는 소리를 들을까 조심한다. 그러나 가슴을 편 자세는 건강 면에서 여러모로 중요한 효과가 있다.
1) 가슴을 펴면, 등이 저절로 펴진다. 목에서 꼬리뼈까지 척추 기둥 전체가 바르게 펴지면서 자연스레 S자 곡선이 된다. 일자허리니 거북목이니 하는 병이 사라진다. 2) 가슴을 펴면, 어깨가 저절로 펴진다. 오십견이 사라진다. 3) 가슴을 펴면, 흉곽이 넓어진다. 폐활량이 늘고 심장 기능이 개선된다. 4) 가슴을 펴면, 머리가 작아 보이는 팔등신 효과가 있다. 5) 가슴을 펴면, 마음이 밝아진다. 당당한 자세에서 당당한 마음이 나온다. 정신이 신체를 지배하는 것도 맞고 신체가 정신을 이끄는 것도 맞다.
기죽은 청년들, 맥 빠진 어른들, 자, 모두 가슴을 펼 시간이다. 여자라면 미스코리아나 슈퍼모델이 된 것처럼, 남자라면 육군사관생도가 된 것처럼, 그렇게 몸을 쭉 펴보자. “벽에 똑바로 서보세요. 가슴을 펴세요. 가슴을 펴면 등이 저절로 펴집니다.” 환자들에게 가슴을 펴라고 나는 오늘도 닦달한다. 유인원의 포즈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세로 진화하는 첫 단계, 가슴을 활짝 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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