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독일 베를린과 뮌스터를 돌아 영국 리버풀과 런던으로 단기연수를 갔던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굽 높은 구두를 즐겨 신고 다녔다. 긴 여정 동안 비행기도, 기차도, 트렁크를 끌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하루 종일 걸어야 하는 날에도 늘 하이힐을 고집했다. 어처구니없이 폼생폼사하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런던에 머물 때였다. 그곳에 사는 영국 친구가 마침 연극을 보여주겠다고 하여 리젠트 거리로 나갔다. 저녁 인파가 몹시 많았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을 상영하는 세인트마틴극장을 찾아서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는데, 대뜸 친구가 내게 “힘들지 않느냐. 왜 그렇게 불편해 보이는 구두를 계속 신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굳이 괜찮다는데도 기어이 나를 끌고 근처 신발가게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서 운동화를 하나 사주었다. 친구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나는 마지못해 구두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그랬더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긴 여정으로 쌓인 피로가 싹 사라지면서 잊고 있던 새 세상이 열렸다. 마치 걸어서 지구 한 바퀴라도 돌 수 있을 듯한 기세가 되었다. 하이힐에서 내려서니 세상을 보는 시선이 조금 낮아지고 겸허해지면서 동시에 세상이 훨씬 더 살 만한 곳으로 느껴졌다. 운동화는 정말 편했다.
그렇게 운동화에 맛들이면서 운동화를 신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몇 년 전부터는 아예 병원에 출근할 때도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대개 병원에서 정장에 구두를 신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여의사는 바지 입는 것도 금지돼 있었다. 하물며 운동화라니! 이런 드레스 코드는 사실 환자를 존중해서라기보다 의사 자신의 직업적 권위와 위계를 위한 집단적 압력이었다. 진료의 효율성에서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의사들은 이 병동 저 병동 다니며 회진을 돌고, 외래로 수술방으로 응급실로 중환자실로 이리저리 뛰어다닐 일이 많다. 이런 측면에서 운동화는 의사라는 직업에 정말 합목적적이다. 처음엔 힐끔대는 시선과 수군거림도 느꼈는데 얼마 지나고 나니, “저 의사는 원래 운동화 신는 사람이야”라며 그러려니 하고 여기는 것 같았다. 한번은 단체회식을 가서 식당 입구에 신발을 죽 벗어놓았는데, 식당에서 나올 때 사람들이 내 신발부터 찾아주었다. "저 운동화 김 선생님 것 맞지요?" 요즘에는 운동화 신는 의사가 하나둘 늘어간다. 어쩌다보니 병원 패션의 트렌드세터가 된 것이다.
얼마 전 한 라디오 방송에서 질문을 받았다. “특별한 건강법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무슨 얘기를 할까 하다가 ‘옳지, 운동화 얘기를 해줘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의학적으로 볼 때 운동화로 덕 볼 수 있는 질병이 여럿 있다. ①무지외반증은 90% 이상이 신발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운동화를 신으면 좋아진다. ②족저근막염에 좋다. 운동화는 발꿈치에 적절한 스트레칭 각도와 쿠션을 준다. ③무좀에 좋다. 운동화를 신으면 나일론 양말이나 스타킹을 벗고 자연히 면양말을 신게 돼 땀이 잘 흡수된다. ④발목이 안정돼 삐는 일이 줄어든다. ⑤무릎 관절에 좋다. 보행시 슬개골 관절면의 압력을 낮춘다. ⑥허리에 좋다. 척추 커브가 좋아져서 디스크 압력이 낮아진다. ⑦걷기가 즐거워진다. 리드미컬하게 계단을 내려올 수도 있다. 유산소운동으로 심폐 기능의 노화를 막고 고혈압·당뇨·뇌졸중·비만 등 각종 대사성 질환의 예방과 치료에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가끔은 구두를 신어야 하는 날이 생긴다. 운동화가 예의 없는 신발이라고 여겨지는 모임이나 옷차림새로 사람을 판단하는 자리에 가야 할 때다. 그럴 때면 나는 작은 쇼핑백을 신주머니 삼아 구두를 담아 간다. 그 장소에 도착해서 구두를 꺼내 신고 일이 끝나면 얼른 다시 운동화로 갈아 신는다.
반갑게도 최근 ‘운도남’과 ‘운도녀’(운동화 신는 도시 남자와 도시 여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현상을 넘어 새로운 신호 아닐까? 우리 사회가 점차 형식과 획일성을 벗어나, 실용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포용하고 관용하는, 더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진정 열린 사회로 가고 있다는 반가운 신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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