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색 코끼리 이야기가 있다. 희귀한 동물인 핑크색 코끼리를 구해오라는 과업이 생기면 각 나라마다 사람들의 반응이 다르다고 한다. 미국 사람들은 회사를 등록하고 지분부터 나눈다. 중국 사람들은 회색 코끼리를 데려다가 핑크색 페인트를 칠한다. 일본 사람들은 핑크색 유전자 연구를 시작한다. 한국 사람들은 무엇부터 할까? 모임을 만들고 감투부터 정한다. 핑크코끼리회 회장, 부회장, 총무, 간사, 고문, 자문 등등.
한국인의 모임 만들기 유전자는 의료계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저 하늘의 별무리처럼 수많은 모임과 별의별 감투가 운행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중추적인 핵심 단체 셋을 꼽으라면 대한의사협회, 대한병원협회, 대한의학회가 있다. 말 그대로 ‘의사협회’는 사람인 의사들이 모인 단체로 의료법이 정한 의사들의 중앙회다. 대한민국 의사면허를 취득한 자는 저절로 회원이 된다. ‘병원협회’는 사람이 아닌 병원들이 모인 단체다. ‘의학회’는 사람도 아닌 병원도 아닌 각종 학회들이 모인 단체다. 세 집단의 구성원은 어쨌든 모두 의사다.
세 집단이 원래는 한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의료제도가 바뀌고 의료 환경이 척박해지면서 서로의 입장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젠 어떤 정책이 나와도 사사건건 으르렁댄다. 정부에서 파이 하나를 던져주면 서로 나눠먹어야 하는 형세가 되어버렸다. 내가 많이 먹으면 상대가 적게 먹을 수밖에 없고 상대가 왕창 먹으면 내가 먹을 게 안 남는다. 의사들 사이에 패가 갈렸다.
최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원격진료와 병원 자회사 설립 허용안을 놓고도 분명하게 의견이 갈린다. 의사협회는 분신을 시도해가며 극렬히 반대하고, 병원협회는 어서 시행되길 조용히 고대하고 있다. 어느 토론회장에서 정부 쪽 대표로 나온 보건의료정책과장이 사전에 공급자와 충분히 협의된 사안인데 왜 이제 와서 딴소리하냐고 발언한다. 의사협회에서 따져 물었다. “누구랑 협의했는가?” 보건의료정책과장은 “원격진료는 시도회장단과 개원의협의회에서 설명한 적 있다. 병원 자회사 설립 허용 등은 병원협회와 협의할 문제이지 의사협회와 협의할 일이 아니다”라고 일축한다.
지난 1년여를 돌아보면 인턴제 폐지를 골자로 한 의사양성제도 개혁안, 전공의 근로기준 개선안, 리베이트 단절 및 자정 선언 등 사안마다 세 단체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엇갈려왔다. 상황을 보면 보건복지부는 단체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과 견제를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현안이나 상황에 따라 누군가를 따돌리기도 하고 입맛에 맞는 누군가를 찾아 협상 테이블에 끌어 앉히기도 한다.
재미있고 미스터리한 단체는 의학회다. 의학회는 형식상 의사협회 산하단체로 돼 있으나 내용상 구성원이 거의 대형병원 의대 교수들이다. 즉 의학회와 병원협회는 언제라도 멤버 교체가 가능한, 사실 그 나물에 그 밥인 셈이다. 안타깝게도 의사협회는 의사 전체의 대표성을 잃고 마치 개원가를 대표하는 듯 반쪽짜리 집단이 되어버린다.
지난해 의사협회가 주도한 리베이트 단절 자정 선언에 의학회가 동참했다. 의대 교수들이 의료계 기득권의 핵심이면서도 그동안 리베이트에 대해 짐짓 ‘내 일이 아니네, 에헴!’ 뒷짐 지고 물러서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여온 점을 상기하면 고무적인 일이었다. 한편, 전공의 수련 개선안을 놓고 어떻게든 현재 시스템을 유지하거나 강화하려는 병원협회의 입장에 대해, 의학회는 “전문화만이 의사들이 살길이다”라고 천명해 병원협회 주장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고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아쉽다! 국민의 시각에서 이들은 각자의 이득을 위해 싸우는 이익집단 그 이상, 이하로도 비치지 않는다. 입으로는 국민의 건강, 안전, 미래, 행복을 이야기하지만 어쩐지 공염불로 들리는 것은 왜일까? 이것이 문제다. 그들은 오래전에 신뢰를 잃었다. 그들의 메시지를 쉽사리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어져버렸다.
호리병 안에 꽉 쥔 주먹들을 펴지 않는 한 그 안에서 손을 꺼낼 수 없다. 호리병이 깨지는 건 아무도 원치 않는다. 누가 주먹을 놓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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