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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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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 교정하는 것보다 놔두는 게 나은 일들

오염과 상처 심한 부위는 바로 꿰매면 덧나기 쉬워
뛰어난 의사는 교정 본능 제어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등록 2013-09-18 15:46 수정 2020-05-03 04:27

완벽주의 여자가 등장하는 어느 소설 속 이야기다. 여자는 의사로부터 심각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당신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러니….” 얘기 도중 갑자기 여자가 일어섰다. 의사는 여자가 너무 충격을 받았나보다 생각을 한다. 그런데 여자는 의사가 앉은 뒤쪽 벽으로 걸어가 거기 살짝 삐뚤어지게 걸려 있던 액자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자, 됐어요. 이제 얘기를 계속하시지요. 제가 저런 걸 보면 참을 수가 없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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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집에 돌아와 자살을 결심한다. 그런데 권총을 꺼내 머리에 쏘려던 순간, 자신의 손톱에 칠한 매니큐어에 흠집이 난 것을 발견하고는 총을 내려놓는다. 매니큐어를 정성스레 다시 칠하고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여자는 마침내 자살한다. 참 어처구니없는 강박증이다.

어느 초등학교 1학년 시험지에 그림을 보고 빈칸에 알맞은 말을 채워넣는 문제가 있었다. 그림에는 사슴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슴이 ○○○ 보아요.’ 빈칸에 들어갈 정답은 ‘거울을’이었다. 한 아이가 답을 ‘미쳤나’라고 적었다. 이때 교육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건 맞고 이건 틀리다. 즉각적 교정에 들어가야 할까? 자칫 섣부른 교정은 아이의 상상력·창의력·자생력에 상처를 주진 않을까?

지난해 출간된 (사진)는 내가 직접 쓰고 그리고 편집디자인까지 해서 만들어낸 책이었다. 그래서 책 모양이 몹시 아마추어적이다. 이 책을 읽은 어느 출판사 편집인이 편지를 보내왔다. 독자로서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편집자로서는 심한 자괴감에 빠졌노라고. 왜냐하면 웬만한 출판사의 편집자가 이 책을 만들었다면, 전문성을 전달하는 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저자의 농담과 유머 일러스트와 인용 문구를 다 풀어헤치고 삭제해버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그럼 이 책은 자칫 날것 그대로의 싱싱함을 상실하고 그저 무난한 책이 될 뻔했다고. 그간 편집자로서의 교정 관성을 반성했다고.

모범생들의 후유증이라고나 할까? 의사 중에도 강박적 교정 본능을 지닌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남자가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 당시 혈압을 재보니 180/90으로 높았다. 어느 초보 의사는 바로 약을 써서 혈압을 정상으로 떨어뜨렸다. 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음날 아침 회진을 가니 환자는 허예진 얼굴에 진땀 식은땀을 마구 흘리며 기진맥진 일어나 앉지도 못했다. 저혈압 증세다. 재빨리 베개를 빼서 머리를 낮추고 혈압을 재니 120/80 정상 수치가 나왔다. 숫자는 정상인데 환자는 저혈압이다. 오랫동안 높은 혈압에 적응돼온 신체 각 기관은 갑작스레 교정된 정상 수치를 오히려 견딜 수 없던 것이다.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도 의사의 섣부른 교정 본능은 자제가 필요하다. 찢어진 피부는 언뜻 생각하기에 즉시 꿰매주는 것이 올바른 치료일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심하게 오염되었거나 주변 조직이 많이 너덜거리는 상처는 바로 봉합하면 덧나기 쉽다. 그보다는 며칠 소독을 하고 항생제를 쓰고 주위 조직을 정리해가면서 깨끗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오히려 뒤늦게 봉합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깔끔하게 한 번에 치료되기 때문이다. 하루는 이 문제를 놓고 어느 선배 의사가 후배 의사를 야단치는 모습을 흘깃 엿보게 되었다. 전날 응급실에 온 환자의 상처를 후배 의사가 생각 없이 너무 일찍 꿰매었기 때문이다. “너는 어째 상처만 보면 참질 못하냐? 옛날 만화 주인공 중에 구두만 보면 달려들어 닦아대는 꼬마귀신이 있었는데, 넌 상처만 보면 달려들어 꿰매대는 꼬마귀신이냐?” 웃으면 안 되는데 나는 그만 웃음이 터져나왔다.

뛰어난 리더는 뒤죽박죽 난장판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정돈된 상태는 결코 오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 살아서 변화한다. 결코 정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치들도 역동적이다. 뛰어난 의사는 역동의 찰나에서 추세를 읽어내 즉각 조치할지 아니면 그냥 놔두고 기다릴지를 결정한다. 참을 수 없는 교정 본능을 제어하고 그냥 놔두는 것, 이것은 어찌 보면 한 단계 고차원적인 능력 아닐까?

김현정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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