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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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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답을 지니고 있다

같은 증세나 질환 겪지만 수술에 대해 다른 답품고 있는 두 환자
선택 가능한 경우에는 자유 주되, 모든 치료에 사랑을
등록 2014-01-30 14:48 수정 2020-05-03 04:27
사람들은 마음속에 이미 나름의 정해진 답을 품고 병원을 찾는다. 서울시내 한 병원의 접수 창구 모습.김명진

사람들은 마음속에 이미 나름의 정해진 답을 품고 병원을 찾는다. 서울시내 한 병원의 접수 창구 모습.김명진

‘편하게 있어’ 코너에는 말귀 못 알아듣는 할아버지 캐릭터가 등장한다. “거기 두세요.” “고기 달라고?” “기침을 하시네요.” “김치찌개?” “잠자코 있을게요.” “뭐? 장작을 패달라고?” 점입가경, 대화는 산으로 간다. 노인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이 알아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실은 병원을 찾는 환자들 중에도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이미 나름의 정해진 답을 품고 오기 때문이다. 올해 칠순인 어느 여인은 무릎이 아파서 병원을 찾아왔다. 관절염이 상당히 진행돼 있다. 연골이 닳아 없어진 주위로 울퉁불퉁 군뼈들이 자랐고 다리엔 변형이 와서 오자다리를 하고 기우뚱 힘겹게 걷는다. 여인은 애초에 병이 생긴 내력이며 그간 이러저러하게 병원을 다녔던 얘기까지 한참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현재 상태와 치료 방법에 대해 의사의 설명을 골똘히 들었다. “그래서 수술받아야 하겠네요.” 환자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도 한편으로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수술을 받기로 했다.

이번엔 나이 지긋한 남자분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큰딸이 병원에 가자고 하도 우겨서 함께 오게 된 것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남자도 오랫동안 무릎이 아팠다. 역시 관절염이 상당히 진행돼 있다. 연골이 닳아 없어진 주위로 울퉁불퉁 군뼈들이 자랐고 다리엔 변형이 와서 오자다리를 하고 기우뚱 힘겹게 걷는다. 남자는 현재 상태와 치료 방법에 대해 질문해가며 열심히 설명을 들었다. “그래서 수술받지 말아야겠네요.” 환자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도 한편으로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수술을 받지 않기로 했다.

두 사람이 다녀간 뒤 지켜보던 간호사가 내게 묻는다. “두 분의 증세나 엑스레이 사진이 비슷한 것 같은데 선생님은 왜 다른 답을 주세요?” 그러게….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답을 준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 답을 찾는 걸 도와주었을 뿐이다. 황희 정승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떤 남자가 찾아와 황희 정승에게 물었다. “아버님 제삿날에 우리 집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그럼 제사를 안 드려야 되지요?” “안 드려도 되지.” 얼마 뒤 다른 이가 찾아와 또 물었다. “아버님 제삿날에 우리 집 돼지가 새끼를 낳았지만 제사는 드려야겠지요?” “드려야지.” 부인이 같은 상황에 왜 다른 답을 주냐고 타박하자, 황희 정승은 말했다. “그들은 이미 마음속에 답을 정하고 왔기 때문이오. 그래서 제사 드리기 싫은 사람은 안 지내도록 하고, 제사 드리고 싶은 사람은 드리도록 했을 뿐이오.”

얼마 전 5살 된 조카와 통화하던 중이었다. 이모가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동생네 가족이 지켜봤던 모양이다. “이모 어땠니?” 조카는 대답하길 “이모 우아했어요” 그러는 것이다. 음하하…, 나는 흐뭇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구나. 엄마 바꿔봐라.” 동생이 전화를 받자 물어보았다. “우리 산이가 벌써 ‘우아하다’는 낱말을 다 아네.” “언니 무슨 말이야? 산이는 ‘이모 오래했어요’ 그랬어. 만화영화를 틀어달라고 조르는 걸 참고 기다리게 했거든. 뭘 들은 거야?” 어이쿠, 이모도 듣고 싶은 대로 듣는구나.

소설 에는 다투는 사람들이 모모를 찾아와 누가 옳은지 판결을 내려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모는 그저 가만히 열심히 들어준다. 그러다보면 저들이 마구 떠들다가 결국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 “모모 고마워. 모모 덕분에 화해하게 됐어.” 어떨 때는 내가 모모가 된 것 같다. 환자들은 스스로 답을 찾는다.

수술 받느냐 안 받느냐를 두고 고민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반드시 수술을 받아야 하거나, 또는 전혀 받을 필요가 없는 분명한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수술받는 것도 맞고 수술받지 않는 것도 맞는 둘 다 가능한 경우도 있다. 춘란추국각교시, 봄의 난초와 가을 국화는 각자의 시간이 따로 있다.

“기본에는 일치를, 불확실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성 아우구스티누스 말씀을 그대로 적용한다. 기본 의료 원칙에는 일치를, 선택이 가능한 경우에는 자유를, 그럼에도 이 모든 치료에 사랑을.

김현정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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