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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으러 집에 가는 ‘호플리스’… 삶 어떻게 마감할지 생각하면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 나오는 생의 역설
등록 2013-11-06 14:53 수정 2020-05-03 04:27
‘호플리스’는 의학적으로 더 이상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된 환자를 가족의 원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떼고 집으로 모셔가는 ‘희망 없는 퇴원’을 뜻한다. 서울시립동부병원의 진료 모습.김명진

‘호플리스’는 의학적으로 더 이상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된 환자를 가족의 원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떼고 집으로 모셔가는 ‘희망 없는 퇴원’을 뜻한다. 서울시립동부병원의 진료 모습.김명진

어느 노파가 휠체어에 실려 병원에 왔다. 질문을 해도 눈만 껌벅일 뿐 말을 못한다. 함께 온 아들·며느리가 설명을 대신한다. 노파의 주름진 얼굴엔 표정이 없다. 앙상한 팔다리엔 안 쓴 지 오래된 근육들이 흔적처럼 말라붙어 있고 관절은 오그라들어 펴지지 않는다. 마치 해묵은 기름종이를 구깃구깃 뼈다귀 위에 억지로 발라놓은 것 같다. 팔꿈치와 무릎 여기저기에는 집 안을 오랫동안 기어다녀서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굳은살들이 두껍게 박여 있다.

노파는 10여 년 전부터 치매를 앓아왔다고 한다. 가족들 힘만으로는 돌보기가 너무 벅차져서 지난달 환자를 요양원에 보냈다. 환자 엉치에는 달걀만 한 농양이 잡혀 고름이 나오고 있었다. 아프신지 질문을 드려도 환자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다만 농양을 만지면 짐승처럼 소리를 지른다. 환자를 치료 테이블로 옮기는 데 어른 세 사람이 끙끙 달라붙었다. 아들도 흰머리 성성한 노인이다. 땀방울이 송송 맺힌 그의 얼굴에도 표정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노파는 늙은 아들의 애타는 마음과 수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또 꽥꽥 짐승 같은 소리를 낸다. 노파의 나이는 아흔다섯이었다.

오래전 은퇴하신 은사님 생각이 났다. 그분은 큰딸 내외와 한적한 지방도시에 살고 계셨는데, 한번은 댁으로 찾아뵙겠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몹시 반가워하며 아흔넷의 연세였는데도 기차역까지 손수 차를 몰고 마중을 나오셨다. 여전히 정정하고 재담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갑자기 부고가 들려왔다. 별 아픈 데도 없으셨는데 집에서 의자에 앉아 있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고.

‘호플리스’라는 병원 용어가 있다. 의학적으로 더 이상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된 환자를 가족의 원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떼고 집으로 모셔가는 ‘희망 없는 퇴원’(hopeless discharge)을 뜻한다. 즉, 죽으러 집에 가는 것이다. 의사가 되고 얼마 안 되어 무덥던 6월, 당시 신경외과 인턴을 돌던 나는 중환자실에서 급한 콜을 받고 어느 환자의 ‘호플리스’에 처음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의식이 없어온 환자지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살아서 숨이 붙어 있도록 하기 위해 의사 한 사람이 ‘앰부백’이라고 부르는 작은 수동호흡기를 들고 따라나선다. 사람이 손으로 눌러서 폐 안으로 공기를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장치다. 산송장 같은 환자지만 희미한 자발호흡이 드문드문 손끝에서 느껴진다.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앰뷸런스를 타고 도착한 집에선 친지들이 웅성웅성 벌써 상 치를 채비를 하고 있었고 안방엔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환자를 자리에 눕힌다. 모두 숨을 죽인 채 에워싼다. 그때까지도 나는 진땀을 흘리며 신줏단지처럼 앰부백을 꾹꾹 누르며 환자와 한 덩이로 붙어 있었다. 마침내 환자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앰부백의 연결을 푼다. 기도를 유지하던 호스를 빼낸다. 딸려나온 환자의 침을 닦는다. 나는 침이 마른다. 일거수일투족 파고드는 시선을 느끼며 청진을 하고 몇 번이고 맥을 잡는다. 터질 듯한 침묵 속에 다 함께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 예견된 죽음, 아니 이미 죽음과 진배없는 삶의 경계선에서 의사의 역할은 힘없이 한마디 말을 선언하는 것이다. “운명하셨습니다.” 아이고아이고, 일제히 터져나오는 곡소리를 뒤로하고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온다.

집에서 요양원으로 또는 병원으로, 그리고 집중치료실에서 중환자실로, 그러다가 때로는 호플리스를 떠나는 현대인의 죽음 코스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예전 국정교과서 국어책에 실렸던 이 제목의 수필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한다. 거기에는 두 사람의 살신성인 이야기가 나온다. 절이 불타지 않도록 죽음으로 지켜낸 방한암 선사의 이야기와 사람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부족의 악습을 고치기 위해 스스로 죽어서 제물이 된 오봉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다. 둘 다 죽음 이야기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역설적이게도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맞닿아 있다. 삶을 어떻게 마감할지를 생각하면 거꾸로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나온다.

김현정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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