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눈동자는 검고 다른 한쪽 눈동자는 희뿌연 남자가 있다. 마치 추리소설에 나오는 수수께끼 인물을 연상시킨다. 그는 젊어서 건축 현장에서 일하다가 시멘트 뭉치가 눈에 날아들어 실명하고 말았다. 게다가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 수년 전부터는 척주관 협착증을 앓고 있어서 이따금 정형외과를 찾아와 약도 타고 물리치료도 받곤 한다.
그런데 요즘 부쩍 자주 온다. “며칠 전에 다녀가셨는데 또 오셨네요?” “네, 실은 형님이 입원해 계셔서 병문안하러 오면서 겸사겸사….” “형님이 누구신데요? 진짜 형이오?” “아니요. 몇 년 전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같은 병실에 있으면서 알게 된 형님인데요.” 형님 얘기를 하노라니 무섭게 굳어 있던 남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형님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나는 알게 되었다. 자기 다리도 불편한데 꼭 다른 환자의 휠체어를 밀어주고 다니는 특이한 환자가 있었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형님이라 불린 남자는 오래전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를 다쳤는데 그 후유증으로 대퇴골 골수염이 생겨서 벌써 15년째 허벅지에서 고름을 매일 한 움큼씩 짜내고 있다. 15년간 고름을 짠다는 것은, 10년간 만두만 먹는 설정만큼이나 지독한 일이다. 엉덩이와 무릎은 이미 일찌감치 굳어서 뻗정다리가 되어버렸다. 수도 없이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지만, 뼛속에 한번 스며든 병균은 좀처럼 섬멸되지 않았다. 멈추나 싶으면 어디선가 또 나오고, 사라졌나 싶으면 다시 나타난다. 정글 속 게릴라전 같다. 지루한 싸움에 이젠 나름 선수가 되어 웬만한 고름은 집에서 혼자 짜고 소독하고 드레싱까지 할 수 있다. 그래도 고름이 샘처럼 넘쳐나고 악취가 진동할 때면 형님은 또다시 병원을 찾아온다. 이번에 입원한 것은 골수에 박혀 있는 항생제 구슬을 교체하기 위해서였다. 이게 대체 몇 번째 수술인지, 세다가 잊어버렸다. 그런데도 형님은 늘 자기보다 치료하는 의료진을 더 걱정하며 잘 낫지 않는 것을 미안해한다. 요새 술·담배를 어떻게 하고 계시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하며 허허 웃는다. “술은 끊어서 일절 안 하지만 담배는 못 끊었어요. 한 갑 갖고 이틀 피워요.”
형님의 같은 병실 맞은편 침상에는 발가락이 썩고 있는 한 남자가 입원해 있다. 이 남자는 당뇨병성 족부궤양 때문에 여러 해 고생했다. 여태 발을 안 자르고 버텨왔건만 이번에는 안 될 것 같다. 발이 부풀어오르며 그 속에서 구더기가 수십 마리 쏟아져나왔다. 다음주 마침내 절단 수술을 받게 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 두 환자는 이내 친해져 아침 회진이 끝나자 함께 산책 겸 운동에 나선다. 한 명은 휠체어를 타고 또 한 명은 그 뒤에서 휠체어를 민다. “누가 더 형님이세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두 사람을 만났을 때 인사 삼아 물었다. “제가 형이죠.” 형님이 멋쩍게 손을 든다. “그럼 형님이 동생을 밀어주는 셈이네요.” “그래서 형만 한 아우가 없다잖아요.” 휠체어를 탄 남자가 명랑하게 응수한다. 형님의 나이는 일흔하나다. 병원 안에 동생이 여럿이다. 형님은 절룩절룩 자신의 다리를 끌며 천천히 바퀴를 굴려 발이 아픈 동생을 싣고 앞뜰로 나간다.
어려서 아버지께 들었던 옛날 얘기가 생각난다. 한번은 저승사자들이 저승에 온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고 사람들 팔을 뻗정팔로 만들어 팔꿈치를 못 구부리게 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앞에는 진수성찬을 한상 차려놓았다. 어떻게 되었을까? 먼저 지옥에 가보았다. 지옥 사람들은 각자 조금이라도 먹어보겠다고 상에 달려들어 입으로 물고 뜯고 흘리고 아우성에 난장판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팔을 구부릴 수 없으니 먹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것 참 흉한 모습이었다. 한편 천당 사람들도 그러고 있으려나 가보았더니 웬걸, 천당 사람들은 수저를 들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해가며 서로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고 있더라는 것이다. 타인은 지옥이 아니다. 내 부족함을 타인을 위해 사용하면 타인이 내 부족함을 채워준다. 서로에게 천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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