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이 미국 뉴욕에서 초연하던 1988년 당시 한 달 만에 2년치 표가 팔렸다. 페란 아드리아가 운영하던 레스토랑 ‘엘불리’는 다음 시즌 예약을 받기 시작하는 첫날 단 하루에 이듬해 1년치가 모두 매진되곤 했다.
얼마 전 야구 경기를 예매하려고 인터넷에 들어갔다가 진땀을 뺐다. 접속한 사람들이 어찌나 잽싸게 움직이던지 순식간에 그 많은 자리가 속속 매진돼버리는 것이었다. TV에 소개된 만둣집은 골목 초입부터 길게 줄을 선다. 인기 유치원에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접수해놓거나, 내지는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한다. 지난주 사거리를 지나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수백m의 긴 줄을 발견했다. ‘저 줄의 정체는 뭐지?’ 아파트 청약을 위해 모델하우스를 구경하려는 줄이라고 한다. 올해가 가기 전 취득세 감면 혜택을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었다. 줄서기는 우리 주위에서 흔한 풍경이다. 그런데 줄이 길기로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곳이 또 하나 있다.
일전에 지인에게서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친구 아들이 허리가 아픈데 최근 TV에 자주 나오는 유명한 대학병원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려고 했더니 2년치 예약이 차 있다고 한다며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는 볼멘소리였다. “급한 환자들을 위해 당일 접수라는 게 있을 텐데요?” 그 병원은 그런 것 없고 예약 환자만 받는다고 했다. 응급실에 갈 정도는 아니고, “결국 보지 말라는 얘기네요”. 만일 대한민국에 병원이 그곳 하나라면, 2년을 기다리다가 어떻게 될까? 둘 중 하나다. 앓다가 죽거나 돌이키기 힘든 장애가 되든지, 아니면 저절로 낫거나.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보니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의료열차가 있다고 한다. 더운 지방을 가로지르므로, 다큐에서는 별칭으로 ‘열국열차’라고 재밌게 불렀다. 병원이 귀하고 의료 혜택을 못 받는 지역이 하도 많아서 남아공 정부가 생각해낸 것이 의료장비와 의료진을 실은 기차였다. 기차는 마을에 도착하면 일주일간 머무르며 진료를 하고 다음 마을로 이동한다. 이런 식으로 궤도를 한 바퀴 도는 데 꼬박 2년이 걸린다고 한다. ‘한 번 진료받고 다음번까지는 2년이 걸리는구나. 도중에 아프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냥 참다가 낫든지 죽든지, 그거구나.’ 그에 비하면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정말이지 문명의 행운아다. 어디가 아프면 즉각 병원을 찾아가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한편에선 우리도 역시 2년을 기다리고 있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2년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실은 평생을 기다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은 진료를 안 받아도 무관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병원에서 2년짜리 예약을 겁없이 해주는 이유는 아마 그동안에 저절로 나을 병은 스스로 나아보라는 깊은 배려의 속뜻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병원이라면, 진료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 제때 진료받을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강구해내야 할 것이다. 예약 장부를 보고 기계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2년 뒤의 날짜를 잡아주는 것은 정말이지 분노가 돋는다. 그 유명한 의사 선생님은 알고 있나? 자신이 최소 2년 묵힌 허리병 환자만 보고 있다는 것을.
의사의 명성이 예약 기간으로 측정된다면, 3개월 밀렸으면 3개월짜리 의사, 1년 밀리면 1년짜리 의사, 2년 밀리면 2년짜리 의사가 될 것이다. 정량화하기에 얼마나 깔끔한가! 예약 기간에 따라 목에 힘이 들어가고 ‘에헴’ 헛기침이 나온다. 만나보기 힘들면 힘들수록 훌륭한 의사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대한민국은 쏠림 현상이 심한 나라다. 매스컴에 어떤 뉴스가 뜨면 그리로 확 쏠린다. 또 다른 뉴스가 뜨면 저리로 몰린다. 축구를 처음 해보는 아이들이 축구공을 따라 다 함께 이리 몰려갔다 저리 몰려갔다 하는 것 같다. 어느 의사는 안타까워한다. 예전엔 9시 뉴스에 한 번 나오면 그 효과가 두어 달은 갔는데 요즘은 보름이면 효과가 사라진다고. 그 얘길 듣고 나는 오히려 내심 기뻤다. 획일화된 쏠림 현상이 점차 희석되고 이젠 각자의 다양성이 살아 움직이는 사회로 가고 있다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변화의 신호를 감지한 것 같아서. 하지만 아직은, 오늘도 부지런히 ‘줄을 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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