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내내 오디션이 펼쳐지는 나라에 급기야 주먹 오디션까지 등장했다. 케이블 방송 는 전국의 ‘스트리트 파이터’들을 불러모아 종합격투기 훈련을 시켜 공식 링에서 프로의 룰로 최후의 강자를 가리는 방송이다.
UFC 같은 프로 격투기 대회에서 전투기계가 된 사나이들의 화려한 기술에 학습돼 있던 격투기 팬들에게, 아마추어들의 어설픈 주먹은 싸움 구경을 하는 듯한 박진감과 재미가 있다. 실력보다는 허세가 앞서는 참가자들은 프로선수와의 스파링 도중 기절하기도 하고 코피가 터진 채 실려나가기도 한다. ‘부산의 협객’이 ‘혼혈아 왕따’에게 녹다운되는 해프닝(?)도 발생한다. 일부 참가자들은 “죽여버리겠다” “(내 주먹에) 스치면 간다” 등과 같은 소아병적인 허세로 무장한 과장된 캐릭터를 보여준다.
그러나 격투기 팬들은 이 흥미로운 오디션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어머니가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서 격투기를 시작했다”며 ‘혼혈아 왕따’라는 캐릭터를 가진 우승자 임병희는 사실 오래전부터 합기도와 무에타이 등으로 단련된 유단자라는 의혹을 받았다. 그는 다른 참가자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밋밋하게 지원하니까 안 받아줘서 이번엔 맞고 다닌 캐릭터로 접수하겠다”고 말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케이블 방송의 특성상 여러 이유와 일정 수준의 가공이 있었을 테지만, 나는 이 방송 자체가 조작된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남자들의 본능은 주먹을 섞는 순간 조작이 불가능하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지나치게 개인의 사연에 집착한다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과장된 캐릭터들이 양산된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자신의 주먹 명성을 자랑하는 건달도 흥미로운 캐릭터로 되살아난다. 자칫 그들에게 당했던 폭력의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개인적인 사연 앞에 묻혀버릴 수도 있다.
의학적·윤리적 이유로 복싱의 폐지를 주장해온 사람들에게, 스포츠사회학자들은 ‘복싱의 음성화’를 이유로 맞서곤 했다. 복싱이 없어지면 폭력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원칙도 규칙도 없는 거리의 싸움과, 다른 형태의 경기가 범람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말은 일정 부분 사실이다. 복싱이 쇠퇴한 지금, 격투기 대회는 거의 살인 기술의 전시장이다.) ‘거리의 싸움꾼’들에게 규칙을 입혀주겠다는 의 취지와 콘셉트는 나쁘지 않다. 다만 사연을 가공하고 캐릭터를 포장하면서 음지에서 휘둘러진 주먹에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이 프로그램이 오디션 형식을 고수한다면, 사연에 집착하다 망해버린 한 음악 오디션 프로를 참조하기 바란다. 에서도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순수한(?) 거리의 주먹들은 모두 나가떨어졌고 살아남는 것은 결국 훈련된 아마추어들이었다. 주먹에 얽힌 사연이 없어도 그들은 충분히 흥미로운 격투가들이었다.
김준 사직아재·칼럼니스트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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