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공주’에서 ‘여성’으로 거듭나다

전세계적 흥행 돌풍 일으키며 디즈니 왕국 새 전성기 맞게 한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고전에 현대적 감성 입혀 변형한 서사의 힘
등록 2014-02-20 16:59 수정 2020-05-03 04:27

"FROZEN" (Pictured) ELSA. 짤2013 Disney. All Rights Reserved.

“이제 너는 그 누구에게서도 입맞춤을 받아선 안 돼. 내 말을 어기면 너에게 죽음의 입맞춤을 하겠다.” 그것은 차갑고 고독한 아이가 나오는 이야기였다. 소년 카이는 악마 트롤들이 실수로 떨어뜨린 거울의 파편이 눈과 심장에 박혀, 무엇이든 실제보다 흉측하게 보는 눈과 싸늘한 마음을 가진 아이로 변했다. 어느 겨울날 카이는 눈의 여왕의 유혹에 빠져 북쪽 나라 얼음궁전에 갇히게 되고, 얼음 조각으로 된 퍼즐을 풀어야만 그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미션을 받는다. 카이와 가장 친한 친구였던 소녀 게르다는 사라진 카이를 찾아 모험을 떠나고, 천신만고 끝에 카이를 만나 뜨거운 눈물을 쏟는다. 게르다의 눈물이 카이의 심장에 박혔던 얼음을 녹여 소년은 예전의 모습을 찾고 둘은 눈의 여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탈출한다. 언젠가 한 번쯤은 읽었던 이야기, 1845년 발표된 안데르센의 동화 이다. 1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며 끊임없이 구전돼온 오래된 이야기는 2013년에 이르러 새 버전으로 다시 태어났다. 2월14일 현재 국내 관객 800만 명을 끌어들이며 역대 애니메이션 흥행 1위를 기록 중인 디즈니 애니메이션 이다.

기존 공주 스토리텔링과 같고도 달라

간단하고 거칠게 이야기하면 은 익숙하고 오래된 이야기의 디즈니식 변형이다. 디즈니는 1937년 부터 꾸준히 옛 동화를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다. 시대의 변화를 반영해 캐릭터의 특성은 조금씩 달라져왔지만, 어쨌거나 특유의 공주 캐릭터가 등장하고 선과 악이 대결하며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이야기 구조는 디즈니가 변치 않고 쌓아올린 화법이다. 은 큰 틀에서 이런 이야기 구조를 따르면서도 한편으로 새로운 서사를 창작했다. 전세계적으로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디즈니 왕국의 새 전성기를 맞게 한 의 힘은 무엇일까.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표면적인 이유는 노래다. 극의 주제곡은 세이렌의 노래처럼 사람들의 귀를 혹하게 했다. 포털 사이트에선 한동안 주제곡 (Let it go)의 여러 버전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권에 올랐고, 주제곡 작곡가 부부에 관한 짧은 이슈도 하루 종일 누리꾼들에게 화제가 될 정도로 OST는 인기를 끌었다.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음악영화는 일종의 공연, 퍼포먼스라고 생각하고 계속 보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같은 뮤지컬을 계속 보는 고정 마니아처럼 웹상에는 을 수차례 본 사람들의 ‘간증’이 이어진다. 극을 반복 관람한 팬들은 급기야 엘사의 화장 따라하는 법, 엘사 옷 만들어 입기,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들로 각종 생활용품 만들기, 공전의 히트를 친 ‘겨울왕떡국’ 등 영상 패러디물까지 수많은 콘텐츠를 재생산했다.

원전을 가장 많이 비튼 작품

뮤지컬적 특성이 마니아를 호출하기도 했지만, 국내외 평론가들은 고전에 현대적 감성을 입혀 변형한 서사의 힘이 관객을 추동한다고 평가한다. 은 디즈니가 기존에 취해왔던 공주 스토리텔링과 같고도 다르다.

배경은 북유럽 어디쯤으로 추정되는 가상의 나라, 아델렌. 호수같이 고요한 바다와 높은 산을 배경으로 한 이 아름다운 나라의 궁전에는 두 명의 공주가 있다. 언니 엘사에게는 눈과 얼음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날 밤에도 장난기 많은 안나가 엘사를 졸라 커다란 홀에서 눈을 만들며 놀던 중이었다. 송이송이 피어나던 눈이 거대한 눈덩이가 되듯, 놀이는 점점 절정에 달하고 사고가 일어나고 만다. 엘사는 눈을 만든다는 것이 그만 잘못 조준해 안나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든다. 왕국의 바위 요정들인 트롤의 도움으로 안나는 생명을 구하지만, 그날 밤 있었던 일과 엘사가 가진 마법 능력에 대한 기억은 잃게 된다. 안나는 부모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은둔하라는 지침을 받는다. 궁의 모든 문이 닫히고, 엘사는 점점 강해지는 자신의 능력을 감당하기가 버거워 방문을 걸어잠근 채 더욱 숨어든다. 그러니까 여기까지는 성에 갇힌 공주 이야기? 자, 그럼 이제 우리는 저주 같은 이 마법에서 엘사를 구원할 왕자를 기다리면 되는 건가.

그런데 엘사에게 철저히 자신을 숨기라고 가르쳐왔던 왕과 왕비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전통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했던 부모 세대가 사라진 것이다. 부모를 잃은 고독한 공주는 언제까지 성에 갇혀 있어야 할까. 누가 나타나 왕과 왕비가 사라진 이 왕국을 구할 것인가.

하지만 디즈니는 왕자를 부르는 대신 21살이 된 엘사를 여왕 대관식에 올린다. 여전히 엘사는 자신의 능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숨기기에 급급하지만 대관식 장면은 그동안 성문을 굳게 닫은 것도 엘사의 선택이며, 대관식을 맞아 성문이 열리는 것을 허한 이 또한 엘사임을 내비친다. 여기서부터 애니메이션은 서서히, 엘사가 디즈니의 전통적인 공주 캐릭터와 떨어져 있음을 드러낸다. 그런데 안나가 이날 처음 만난 이웃 나라 왕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선포하고, 엘사가 이에 반대하며 둘은 갈등을 일으킨다. 마법을 통제하지 못한 엘사는 본인도 모르게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거대한 얼음 조각들을 만들어낸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들켰다는 것에 대한 당황과 절망, 분노 등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왕국을 온통 겨울로 만들 정도로 거센 마법을 부린다. 엘사는 북쪽 산으로 도망쳐 자신만의 얼음궁전을 만들어 그곳에서 혼자 사는 대신 자유를 찾기로 결심한다.

이쯤 되면 원전을 아는 관객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엘사는 얼음궁전에 스스로를 가둔 한편 거기서 자유를 찾았고, 안나는 겨울왕국이 된 아델렌의 계절을 되돌리고 언니와 화해하기 위해 모험을 떠났다. 그렇다면 안나가 게르다 캐릭터이고 엘사는 카이인가. 그런데 그는 눈과 얼음을 관장하는 눈의 여왕이기도 하지 않은가.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과사전 사이트인 ‘디즈니위키아’에서는 엘사가 “디즈니 공주들 중 여성과 남성 캐릭터 모두에 기반한 첫 번째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은 디즈니식 동화 애니메이션 중 원전을 가장 많이 비튼 작품이다. 원전과 애니메이션의 각 캐릭터들이 공식처럼 딱딱 들어맞지 않는다. 원작에서 악마였던 트롤이 순박하고 착한 캐릭터로 변했고, 카이이기도 눈의 여왕이기도 한 엘사는 피해자도 악녀도 아니다. 고독과 비극성을 지닌 인물, 엘사 그 자체로 보인다. 다만 애니메이션은 에서 이야기의 큰 틀을 빌려오고 안나, 크리스토프, 한스 등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안데르센의 풀네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에서 조금씩 따오고, 궁을 지키는 집사에게 카이와 게르다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원작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기존 디즈니 작품들이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을 향하기 위해 원전이 변형됐다면, 은 그동안 디즈니가 쌓아올린 공식을 허무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변형된다. 그런 가운데 기존 디즈니에서 없었던 새로운 여성 캐릭터가 제시됐다. 디즈니는 나 등 초기 동화 애니메이션에서 가부장적 통념 안에서 여성상을 제시하고 이를 1970년대까지 이어왔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포카혼타스나 뮬란처럼 좀더 능동적인 캐릭터를, 2000년대 들어 의 메리다처럼 씩씩하고 자유분방한 여성 캐릭터를 허용했다. 기존 캐릭터들이 하얀 피부에 우아하게 행동하는 공주들이었다면, 뒤로 갈수록 피부색도 다양해지고 행동도 좀더 적극성을 띤다. 엘사의 경우 외모는 과거의 완벽한 공주에 가깝지만, 갈등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은 이전 캐릭터에 비해 훨씬 주체적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희생, 여성적 연대

발랄하고 쉽게 사랑에 빠지는 안나는 극 초반에는 기존 공주 캐릭터를 답습하는 듯하지만, 안나가 왕자와의 사랑이 진짜가 아니라고 깨닫는 사건은 엘사가 자신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과정만큼이나 이야기의 큰 줄기로 작용한다. 안나의 모험이 조지프 캠벨이 에서 제시한 영웅 모험 단계를 고스란히 따르는 점도 눈에 띈다. 모험의 소명을 받아 특별한 세계로 진입해 협력자와 적대자를 만나고 시련을 이겨낸 다음 보상을 받고, 일상 세계에서 또 하나의 관문을 거쳐 부활을 경험하고 다시 귀환하는 영웅 모험 구조는 안나의 여정과 흡사하다. 남-여가 아닌 여-여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나섰고, 한 명은 왕국의 여왕으로 또 한 명은 진정한 모험가로 거듭난다. 백마 탄 왕자는 배신했으며, 안나는 남자 주인공에게 키스를 받는 대신 모험 중 망가뜨린 썰매에 대한 보상으로 ‘얼마면 되겠니?’를 말하는 인물이다. 오랫동안 보수성을 띠었던 애니메이션 세계에서 두 여성 캐릭터의 등장은 에서 괴물 공주의 탄생만큼이나 꽤 진보적인 변화다. 현지 평론가들 또한 디즈니 스튜디오의 여성을 바라보는 태도 변화에 대해 “디즈니의 진정한 첫 번째 페미니스트 영화, 백설공주가 1930년대의 여성상, 벨이 1990년대의 여성상을 반영한다면, 안나는 새로운 세기의 여성”이라고 평한다.

자신의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엘사와 위기에 처한 안나를 구하는 이는 먼 나라에서 달려온 왕자가 아니다. 이들은 서로 포용하고 이해하는 연대를 통해 스스로를 구출한다.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제공

자신의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엘사와 위기에 처한 안나를 구하는 이는 먼 나라에서 달려온 왕자가 아니다. 이들은 서로 포용하고 이해하는 연대를 통해 스스로를 구출한다.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제공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엘사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자기 안의 힘, 그게 섹슈얼리티일 수도 있고, 여성 자신이 가진 무서운 내면일 수도 있는데, 여태껏 늘 타자화·대상화됐던 여성이 자기 자신을 자각했다는 점이 현대적 감성에 맞는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안나의 이야기도 그렇다. 진정한 사랑이란 이 남자 혹은 저 남자와의 키스냐, 이때까지 이야기들은 그 선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자매애로 결론짓는 영화는 진정한 사랑이란 희생, 여성적 연대임을 제시한다. 기존 서사를 부순 이런 이야기들이 화려한 비주얼과 뮤지컬 방식 등 시청각적인 만족을 주면서 다른 애니메이션과 비교가 안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주제곡 가 변화를 상징

요약하면, 디즈니는 2000년대 초반부터 을 원전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뒤엎길 반복하면서, 공주와 왕자 관성의 법칙을 깼더니 디즈니 왕국에 마법 같은 변화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주제곡 (잊어버려) 또한 디즈니의 변화를 상징하는 듯하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착한 소녀가 되렴. 감추고, 느끼지 말 것, 누구도 알아차려선 안 돼.” 이것이 그동안 엘사 혹은 기존 여성 캐릭터들을 억눌러왔던 말이라면, 엘사는 그 굴레에서 탈출해 이렇게 화답하기로 한다. “상관없어/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폭풍아 계속 휘몰아쳐라… 한계를 시험하고 부수고 나아가겠어/ 옳고 그른 것, 규칙 따윈 내게 없어/ 난 자유야/ 다 잊어.”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