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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행동하고 계획은 다음에

앞을 뒤로, 뒤를 앞으로
등록 2014-01-30 16:09 수정 2020-05-03 04:27
영화사 제공

영화사 제공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제일 슬픈 구절들을” 이것은 정현종 선생이 번역한 파블로 네루다의 저 유명한 시 첫머리다. 스페인어는 원래 동사가 앞에 오고 목적어가 뒤에 오니까 “오늘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들을 쓸 수 있다”라고 평범한 우리말 어순으로 번역해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절묘한 도치 때문에 시적인 울림이 생긴다.

서울 홍익대 근처 카페 ‘미카야’의 팥빙수를 좋아한다. 맛도 맛이지만 이 팥빙수의 독특한 점은 그 순서에 있다. 보통의 팥빙수는 간 얼음을 먼저 넣고 그 위에 팥을 끼얹는데 이곳의 팥빙수는 그 반대로 한다. 팥을 먼저 넣고 보송보송한 우유얼음을 그 위에 빠짐없이 덮는 것이다. 팥빙수를 받으면 눈처럼 흰 얼음 위에 흰 떡만 보여서 온통 새하얀 것이 깨끗한 느낌을 준다. 이 느낌은 끝까지 유지되는데, 보통의 팥빙수는 팥이 얼음을 누르며 녹아들어 먹다보면 질척해져버리는 반면 이 팥빙수는 얼음이 팥에 눌리지 않아 끝까지 보송함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순서를 뒤바꿔보는 것은 때로 아주 강력하다. 이창동 감독의 (사진)에서 설경구는 달려오는 기차 앞에 서서 “나 돌아갈래!”를 외치고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됐다면 이 마법 같은 강렬함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는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려 10분이 지나면 기억을 잃는 주인공을 내세워 이야기를 거꾸로 전개해나간다. 역행캐논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지점은 사건의 내용에 있는 게 아니라 순서를 뒤집은 형식에 있다.

톰 피터스와 로버트 워터맨은 기업에서 무엇보다 ‘실행’이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썼다. “준비! 발사! 조준!”(Ready! Fire! Aim!) 기존의 준비-조준-발사에서 조준과 발사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다. 계획만 세우면서 행동을 늦추지 말고, 일단 행동한 뒤 오차를 파악해서 다시 조준하라는 뜻이다. 국토가 파괴되더라도 일단 행동을 앞세웠던 공사판의 제왕, 전임 대통령이 떠올라 좀 오싹하긴 하지만, 순서를 뒤바꾼 이 어법은 무척 신선하고 인상적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순서는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일상의 작은 것에서, 순서를 한번 바꾸어보자. 라면을 끓일 때 면을 먼저 넣는 게 아니라 수프를 먼저 넣으면 끓는점이 높아져 더 맛있다고 하지 않던가.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재킷이나 코트 위에 조끼를 입은 스타일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래, 꼭 조끼를 먼저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런 것이 재미있다.

김하나 저자·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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